[뉴라이트 특집] 뉴라이트를 넘어 탈식민-탈냉전-탈패권의 새로운 질서로
남기정(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식민-냉전-패권주의자의 이름, 뉴라이트
2024년 여름, 뉴라이트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열대야 연속기록을 경신해 가던 여름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2019년 여름, 아베 일본 수상이 수출규제조치를 발동하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지 5년만의 일이다. 이후 한반도는 대전환의 입구에서 물러나 대반동의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018년 평창의 봄 이래, 4월에는 남북 간에, 6월에는 북미 간에 정상회담이 열려 한반도 탈냉전-탈패권 체제로의 대전환이 개시되었다. 10월 말에 나온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대법원 판결은 탈냉전-탈패권의 과제가 탈식민의 과제와 하나로 엮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5년 후 2023년의 일련의 사태들은 2018년의 사건들을 역방향으로 전개시키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시계가 대전환에서 대반동으로 역진하기 시작했다. 3월 6일 윤석열 정부가 대법원 판결의 해법으로 제3자 대위변제를 내놓은 것이 기점이 되었다. 이후 식민지배의 역사는 봉인되고 냉전의 지정학이 봉인 해제되었다. 3월에는 한일 간에, 4월에는 한미 간에, 5월에는 다시 한일 간에, 그리고 8월에는 한미일 간에 정상회담이 열려 동북아 패권체제의 재건이 시도되었다.
이후 한반도는 캠프데이비드의 시간 속에서 식민-냉전-패권 세력이 부활하며 대반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2018년 탈식민-탈냉전-탈패권 체제를 향한 대전환의 여정을 내디딘 지 5년만의 일이다. 역진의 진원지는 일본이고, 그 주역은 일본의 반북주의자들이며, 2023년 2월이 그 기점이다.
2023년 모습을 드러낸 ‘안티반일’의 한일연대
2023년 1월 12일 국회에서 강제동원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제3자 변제’안이 공식적으로 수면 위에 떠 오른 날이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월 17일, 일본에서 아베 수상을 머리에 이고 역사부정론과 반북여론을 주도해 온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가 코로나 사태 이후 3년 만에 서울에 나타났다. 니시오카는 당일 수요집회에 맞서 ‘수요맞불집회’에 참석하고, 19일에는 이승만학당,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국민행동), 미디어워치 등이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에서 ‘안티반일’ 지식인들과 위안부 문제로 간담회를 가졌던 것이다.
미디어워치 황의원 대표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 정안기 전 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김세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손기호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회장, 진명행 작가 등이 참석했다.
니시오카는 이제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며, 아시아여성기금 등을 위해 노력했던 일본 내 일부 좌파들조차 한국과 더 이상의 소통은 포기한 상황이라고 하면서, 이제 한일 양국이 진실을 공유하는 것이 한일 우호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위안부’ 문제와 ‘징용공’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양보하더라도, 한국 내 당사자들이 “친북극좌‘ 단체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해결되지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제안은 일본의 나데시코 액션, 한국의 공대위, 국민행동, 엄마부대 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등 ”한일 양국의 진실 세력“이 공동으로 계속해서 자국과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말하는 것만이 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캠프데이비드의 여운이 남아 있던 그해 9월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자유통일을 위한 국가 대개조 네트워크(대표 김학성)’ 주최로 ‘제2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합동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1년 전(2022년) 11월 도쿄에서 개최된 데 이은 두 번째 심포지엄이었다. 여기에도 니시오카는 참석했다. 그 외 일본에서 야마모토 유미코(山本優美子) 나데시코 액션 대표, 마쓰키 구니토시(松木国俊) 국제역사논전연구소 수석연구원 등이 참석했으며, 한국 측에서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등이 참석했다. 사회는 미디어워치 외신 전문 객원기자라는 직책의 요시다 겐지(吉田賢司)가 맡았다. 위 네트워크의 사회문화문과 책임자가 류석춘 교수다. 니시오카는 다음날인 9월 6일, 참석자들과 함께 ‘수요맞불집회’에도 참석했다.1
이 심포지엄을 ‘자유통일을 위한 국가 대개조 네트워크’가 주최한 데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들의 입장이 드러난다. 이른바 반대한민국 세력에 맞서 자유우파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가 대개조와 자유통일에 나설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그 ‘전장’이라는 것이다.
한일 안보 문제로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9월 5일의 심포지엄은 니시오카가 주장하는, 소위 “한일 양국의 진실 세력”이 서울 한 복판에서 실체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니시오카와 이우연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연대 활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었으며, 특히 지난 문재인 정부 시기, 반문재인 전선에서 더욱 긴밀히 연계되고 있었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2015년 일본군‘위안부’ 합의 검증 보고서가 발표되고,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온 데 따라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것이 배경이 되었다. 다만 그 위기의식은 ‘위안부’나 ‘강제동원’과 관련된 역사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안보의 문제였다.
니시오카는 이우연이 번역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의 서문에서, 한국에서 대법원 판결이 나온 데 대해, “한일관계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적었다.2 그는 서울에서 전 국정원장 등 전직 관료, 언론인들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일을 이간시켜 한미일 3국 동맹관계를 약체화하려고 중국과 북조선이 수십 년간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키워왔다. 그 결과 합리적 논의가 불가능할 소지가 생기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은 북조선뿐”이라는 것이다.
니시오카에 따르면 또 다른 인사는, “문재인 정권이 한국의 국익을 대표하지 않고, 북조선 독재정권에 봉사하고 있어서 모든 일이 곤란해졌다. 우리 한국 국민의 힘으로 한국에 대적하는 문재인 정권을 교체시키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니시오카는 “북조선의 세습독재 테러정권과 중국 공산당의 파시즘 통치 행위는 한일 양국의 공통의 적이다. 이와 같은 공통의 적이 있는 이상 한일은 서로 힘을 합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일본 보수가 볼 때 납득할 수 있는, 자국의 차별주의적인 반일에 대한 공개적 비판이 나오지 않는 한, 유감스럽지만 관계는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시오카는 한국의 ‘보수’들과의 대화 가능성에 들떠 있었다. “역사인식 문제에 관한 한 나의 주장을 한국 측이 귀를 기울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우연 박사로부터 자신의 저서를 번역 소개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고, “40년 이상 한국 연구를 계속해 온 자칭 ‘애한파’로서 감격스럽고 가슴이 뿌듯하다”고 피력했다.
이우연은 이어서 니시오카의 위안부 관련 서적을 번역 출판하면서 니시오카의 주장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우연은 일본의 소위 ‘양심 세력’이 반일 종족주의를 한국에 심고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고 전제하고, 이들과 달리, 일본에서도 지난 수십년간 그 “양심세력”에 대해서 진실을 무기로 싸워온 사람들이 있는데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 세력은 이 사람들에게 “극우”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사람들의 주장을 오랫동안 검열하고 왜곡해 왔기에, “이제 한국은 일본의 ‘극우’가 뒤집어 쓴 누명을 벗기고 그들에게 합리적 자유 보수파라는 정당한 이름을 붙여”주고, “일본의 자유 보수파와 토론하고 연대하여 공동의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법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같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3
일본의 반북 캠페인과 한일 과거사 문제
니시오카는 1956년생으로 일본 레이타쿠대학 객원교수이고, 모랄로지연구소 역사연구실장이며, 북조선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구출회) 회장이다. 1979년 국제기독교대학을 졸업하고 쓰쿠바대학 대학원 지역연구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연세대학교에 유학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주한일본대사관 전문조사관으로 근무했으며, 1984년부터 1991년까지 현대코리아연구소 주임연구원, 1990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현대코리아(現代コリア)』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金丸信)와 다나베 마코토(田辺誠) 방북단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여 3당공동성명을 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현대코리아』를 이끌며 납치일본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던 사토 가쓰미(佐藤勝巳)가 반격을 개시했고, 『현대코리아』 그룹에서 사토와 함께 활동하던 니시오카가 『諸君!』1991년 3월호에 「北朝鮮『拉致』日本人の利用価値」를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어서 니시오카는 1992년 8월에는 『日韓誤解の深淵』이라는 첫 단행본을 출판하기도 했다.
1990년 10월에는 8개 한국 여성단체가 위안부 문제 6개 항목의 요구를 제기하자, 『현대코리아』 그룹은 이에 대해서도 반발하면서, 사토가 1991년 1월호에 반박의 글을 게재했다. 이후 일본에서 납치 일본인 문제가 부상하는 것과 동시에 현대코리아 그룹도 부상했으며, 『현대코리아』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박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1990년부터 시작되는 제1차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을 배경으로 일본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1987년 민주화혁명 이후 지구적인 탈냉전 속에서 1988년 7.7선언이 발표되어 동북아 냉전과 한반도 정전의 ‘2중의 전후체제’ 극복이 개시된 시점이다. 북일관계도 이에 연계되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제기하여 이에 개입하고, 일본이 납치일본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국 북일교섭은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 냉전-정전체제 해체는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고, 이후 북미, 북일관계는 다시 적대적인 관계로 전개되면서 한반도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를 수습하고 다시 냉전-정전체제 해체를 통한 평화구축 프로세스가 개시되는 것이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였다. 1998년 한일공동성명과 2000년 남북공동성명, 그리고 2002년 북일공동성명이 이 시기 평화구축 프로세스의 성과였다. 니시오카가 다시 활발히 저술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이러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 평화 프로세스의 시기로, 그의 글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논단』 108호에 실린 「북풍사건은 북조선의 모략」은 니시오카의 글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 글이었다. 1999년에는 『한국논단』 116호에 「남조선혁명 준비 끝났다」는 글이 게재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같은 해 일본에서 출판된 『金正日と金大中:南北融和に騙されるな!』(PHP研究所)가 『김정일과 김대중: 남북한 화해에 속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박화진 옮김, 한국논단, 2000).
이 책에서 니시오카는 1987년의 민주화혁명은 주사파가 주도해서 일어난 것으로, 이후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것은 친북 반미의 주사파 활동가들이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김대중 정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 햇볕정책으로 귀결되었는데, 그 결과 한국에서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는 대신, 북한은 자신감을 가지고 상황을 주도하고 있으며,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 김정일에 의한 대한민국 파괴공작이 시작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이를 위한 공작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다.4
일본의 안전보장과 ‘일한 보수파의 대화’
그의 이러한 시각은 노무현 정부에 들어 한국에 친북좌파와 한미일동맹파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는 인식으로 발전했다.5 2002년 북일국교정상화 결과 납치일본인 문제가 불거진 이후 2004년 연말, 북한이 건넨 요코타 메구미(横田めぐみ)씨의 유골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이를 거짓으로 판단하면서 반북 캠페인이 최고조에 이르러 니시오카가 일약 시대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때다.
2005년에 일본어로 출판되어 이듬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한국분열: 친북좌파와 한미일동맹파의 내전(이하 한국분열)』에서 니시오카는 “한국은 지금, 한미일의 남방 3각동맹(한미동맹, 일미동맹, 일한우호관계, 이하 한미일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 주류 세력과, 그로부터 이탈해서 친김정일, 친중국 측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친북좌파 세력 사이에서 이념적, 사상적, 정치적인 ‘내전’ 상태에 있다”고 보고, “대한민국이 살아남느냐는 이 ‘내전’에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걸려 있다”며, 바야흐로 한반도의 대립축이 38도선이 아니라 남쪽 내부에 있다고 하여 “한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진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내 친북좌파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친북좌파 세력’은 ”좌경민족주의를 방패막이로 삼아, 친김정일 노선을 강화하고, 중국쪽에 접근하기 시작해서”,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보수파를 분열시켜 김대중 정권을 수립하고” 2002년에는 “여자중학생이 미군 차량에 치어 교통사고로 죽은 사건을 ‘미군에 의한 학살’로 선동하고, 친미보수파를 두들겨 노무현 정권을 성립시켰고, 2004년 4월의 총선거에서도 대중 언론을 이용한 선동으로 보수파를 몰아세워, 국회 내에서도 친북좌파세력이 과반수를 점하게 되는 사태를 만들었”는데, 친북좌파 세력의 목적은 “일한관계를 악화시켜, 한미일 남방 3각동맹을 약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시오카의 주장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다음의 대목이다. 즉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이 남방 3각 동맹으로부터 조금씩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만일 이 노선이 강화되면 한일관계는 중대한 전기를 맞이한다고 하여 “일한관계를 안보문제로 파악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반일에는, 한미일 동맹을 깨려는 친북좌파가 주도하는 것과, 한미일 동맹의 유지 강화를 전제로 하는 보수파에 의한 것이 있어서, 일본의 진정한 적은 전자”인데, “현실에서 김정일 주도로 한 통일 가능성이 나왔다는 것. 이것이 일본에 사활문제”가 되어 있으며, “일본의 안전보장의 관점에서, 한반도가 전부 적대세력 손에 들어가는 사태를 어떻게 해서든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를 위해 니시오카가 제시한 대안이 ‘일한 보수파의 대화’다. 일본의 국익은 “한미동맹이 재강화되고, 한미일 남방 3각 동맹의 단결과 협력으로 김정일 정권의 핵무장을 완전히 포기하게 해서 납치문제의 완전해결을 도모하는 것”이며, 한국의 보수파는 ‘애국자이며 민족주의자’이기에 역사문제에서 “일치를 요구하지 않는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면, 김정일을 적으로 하는 점에서 동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후 이영훈 등의 『반일 종족주의』에 이어지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의 출판은 니시오카가 『한국분열』에서 ‘일한 보수파의 대화’를 제안한 이후 10여년에 걸친 성과였던 것이다. 즉 『한국분열』에서 그는 “한국은 현재 이념적, 사상적, 정치적 내전 상태여서, 38도선이 전장이 아니라 한국 내부가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상대측은 비합리주의, 비과학주의, 미신이라고 하는 한국인이 가진 전근대적인 부분, 뒤떨어진 부분이다. 그런 부분을 좌파가 악용하여 대한민국에 대해 도전을 걸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반 대한민국 세력에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한 ‘반한’ 세력은 비합리주의, 비논리주의, 비상식 위에 서 있는데, 바로 지금 그런 것이 온통 감싸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에서 “친미 반김정일을 주장하는 풀뿌리 애국세력이 강한 위기감을 갖고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고 하여, “이 세력과 우리가 어떻게 연대, 협력하는가가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의 ‘역사전쟁’과 한국 보수우익의 체제전쟁
2012년 연말 일본에서 제2차 아베 정권의 등장으로 니시오카 등이 전개하는 반북 캠페인의 폭과 깊이는 더욱 커졌다. 이는 산케이신문이 개시하여 아베 정부가 공식화한 ‘역사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역사전쟁’은 2014년 10월, 산케이신문사에서 출판된 『歴史戦』에서 비롯되었다. 그 부제는 ‘아사히신문이 세계에 퍼뜨린 “위안부”의 거짓을 처단한다’였다. 이는 같은 해 4월 1일부터 산케이신문 조간에 연재된 ‘역사전쟁’ 시리즈 기사를 재구성한 것이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역사전쟁을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고, 그 목표는 ‘전후 민주주의’의 일익을 담당해 온 아사히신문이었다. 산케이신문의 기사들은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을 직접 다루지 않고, 아사히신문의 ‘날조’와 이에 근거한 한국정부 및 한국인들의 ‘부당한 공격’과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그 주장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역사를 무기로 한 전쟁=역사전’을 걸어왔으니, 이에 대해 정면에서 반격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
『歴史戦』의 서두에서 산케이신문사가 개시한 캠페인을 ‘歴史戦=역사전쟁’이라고 명명한 데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 속에 미일동맹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명확한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7
니시오카는 2013년 5월에 발간된 한 기사에서 중국공산당이 1990년대 이래 국제적인 반일모략을 전개해 왔다고 하여 이를 역사전쟁이 개시되는 시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2013년에서야 역사전쟁으로 명명하는 배경에는 중일 GDP의 역전현상이 있었다.
이후 일본의 보수 우익에게 미일동맹의 중요성은 더 커졌으며, 더불어 한국과의 공동전선 구축이 긴요한 과제가 되었다. 한국과의 ‘역사전쟁’을 일단락했던 것이 2015년 위안부 합의였으나, 2016년 늦가을부터 시작된 촛불 정국 속에서 미일동맹은 사활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2017년 2월 17일, 『산케이신문』 조간에 실린 이노우에 가즈히코(井上和彦)의 칼럼 「동맹 강화가 역사전을 봉쇄한다」에서 전개했던 주장이 대표적이다. 즉 미일동맹 강화가 ‘역사전쟁’에 대한 유효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햔편, 니시오카가 주목한 한국의 보수=자유우파의 목소리도 조직화되고 있었다. 2015년 12월 28일의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들의 주장은 반대파의 거대한 함성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정대협에 대해 좌파 집단이라는 비난이 활자화되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조우석 KBS 이사가 2015년 12월 28일 당일 『미디어펜』에 기고한 칼럼이 그 예다. “정대협은 겉으로 ‘민족주의 장사’를 하지만, 실제론 좌파 집단”이라며, “정대협이 반일 민족주의 간판 뒤에 숨어 반대한민국, 반미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너무나 많다”고 하여, 그는 “1990년 초반 탄생 때부터 한미일 삼각동맹의 파행을 겨냥했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그는 2015년 10월 8일의 한 토론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추진되고, 그 이면에서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데 대해, 종북반일로 비난하면서 아스팔트 우파로 조직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문재인 정부 비난은 1987년 체제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조우석의 칼럼에서 이들의 역사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자유 우파 35년, 좌파 35년으로 시대구분하고 있다. 건국 이후는 우파가 주도권을 잡았다가, 87년 개헌을 기점으로 해서는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은 “껍데기만 자유민주주의이며, 속에선 주사파가 장난치는 변종의 체제인데, 지금 문재인 정권은 그 정점”이라고 주장했다.8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탄생했다. 그리고 ‘일한 보수의 대화’로 엮인 한일 ‘안티반일’ 네트워크가 서울 한복판에서 승리 세리모니를 열었던 것이 앞서 언급한 ‘제2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합동 심포지엄’이었다. 이들이 지금 전개하고 있는 것이 주사파를 상대로 한 제3차 역사전쟁이다. 다시 조우석 칼럼을 인용해 본다.
조우석은 “피 터지는 주사파와의 전투는 결국 현대사 인식을 둘러싼 3개의 고지전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1차 ‘건국 전후사’, 2차 ‘박정희 시대’를 거쳐, 3차 ‘80년대’의 재해석이라는 고지전을 지금 전개하고 있다고 보았다. 두 전쟁에서 자유우파는 성취와 팩트를 배경으로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해 왔는데, 문제는 80년대라면서, 주사파는 “전두환과 80년대를 악마화하고, (중략) 광주5.18을 자신들의 정치 도덕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하여, 80년대 재해석 전쟁에서 자유 우파가 깨지면 우린 갈 곳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5.18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구조가 같다”면서, “실체가 없는 허구에 토대를 두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며 반일 죽창가에 친일파 척결을 외치는 헛소리나, 5.18을 앞세운 민주화 타령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승리를 낙관했다.9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뉴라이트 전성시대의 개막
니시오카는 한일 역사인식 문제에 ‘4요소’가 있다고 오래 주장해 왔다. 첫째, 일본 내 반일 매스컴, 학자, 운동가가 사실에 반하는 일본 비난 캠페인을 개시하고, 둘째, 중국과 한국 양 정부가 정식으로 외교 문제로 삼아 ‘내정간섭’적인 요구를 강요하면, 셋째, 일본 외교 당국이 이에 명확하게 반론하지 않고 요구를 대충 들어주는 것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넷째, 일본 국내외의 반일 활동가가 근거 없이 일본 비난을 국제사회에 확산시키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베 정부 이후 세 번째 요소가 변화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의 태도가 변화하여, 한국의 부당한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 단언하고, 한국 정부를 향해 국내에서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안이한 사죄나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0
이제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두 번째 요소가 변화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및 ‘강제동원’ 문제를 이제 더 이상 외교 문제로 삼지 않으며, ‘내정간섭’적인 요구도 강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베 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 내 ‘반일 매스컴, 학자, 운동가’의 영향력도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2020년 5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정대협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넷째 요소인 국제 사회에서의 ‘일본 비난’도 약화되었다. 그리고 작년 8월 18일 캠프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삼각동맹이 드디어 윤곽을 드러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전선으로 한 ‘역사전쟁’에서 한미일동맹파의 한일연합이 승리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바야흐로 2024년 여름 뉴라이트 전성시대가 열렸다. 사도광산을 둘러싼 대일외교에서 ‘불법적 식민지배’라는 역사전쟁의 불후퇴방어선을 포기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일본은 사도금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면서 강제동원의 사실을 교묘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지웠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혜’였다는 일본 측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이 전면화하고 있다. 7월 30일에는 『반일종족주의』의 공동집필자인 김낙년 전 동국대 교수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취임하고, 8월 6일에는 1919년 건국설을 ‘치명적인 오류’라고 주장하는 김형석 대한민국역사미래 이사장이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반발한 광복회가 불참함으로써 반쪽짜리로 전락한 광복절 행사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사 언급 없이 경축사를 발표했다. 한일 ‘역사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남남 ‘역사내전’을 개시하는 선전포고로 들렸다. 그리고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발언이 나왔다.
그런데 ‘뉴라이트’의 진짜 전선은 역사가 아니다. 지난 8월 27일 김선호 국방부 차관이 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한일ACSA)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사건이었다. 상호군수지원협정이라는 것은 평시에는 물론 전시에 각종 군수 물품과 용역을 지원하는 협정을 말한다.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제외하고 모든 영역에서 상호간에 군사지원과 협력을 약속하는 것인데, 후방지원의 전쟁으로 치러지는 현대전에서 거의 동맹조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뉴라이트’가 개시한 남남 ‘역사내전’은 한반도의 남부를 대륙봉쇄의 전방 전진기지로 내어 주기 위한 전초전인지 모른다.
탈식민-탈냉전-탈패권의 새로운 질서로
그러나 뉴라이트의 승리는 잠정적인 것으로 보이며, 오래 지속될 것 같지도 않다. 미국과 일본 측에서 ‘불가역적 제도화’ 논의가 성급하게 나오는 것에서 거꾸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미일 삼각동맹의 제도적 장치는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나치게 확대된 ‘역사전쟁’에서 윤석열 정부의 역사인식은 보수 내부에서 분열을 야기하고 있어서, 반북-친미 진영이 구축한 역사전선은 오히려 취약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민주평화 진영이 역사전선에서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연대를 재구축하는 일은 1987년 민주화혁명 이래 최대 과제로 재부상하고 있다. 한일 민주평화 연대의 재구축과 역사전쟁에서의 통일전선 구축이 이 지역에서 고조되는 전쟁 위기를 제어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적이 없다. 식민-냉전-패권체제를 대체하여 탈식민-탈냉전-탈패권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인지 모른다.
[각주]
1 「위안부 문제는 국제 사기극, 한일 양국 지식인들 내달 심포지엄 개최」, 『미디어워치』, 2023.8.19. https://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6735
2 니시오카 쓰토무 (이우연 옮김),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미디어워치, 2020.12. 9
3 이우연, 「역자후기」, 니시오카 쓰토무 (이우연 옮김), 『한국 정부와 언론이 말하지 않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 미디어워치, 2021.4.
4 西岡力, 『金正日と金大中』, 2000, 88-90쪽, 100쪽, 111-114쪽.
5 西岡力, 『韓国分裂−親北左派vs韓米日同盟派の戦い』. 扶桑社, 2005 [니시오카 쓰토무 (이주천 옮김), 『한국분열: 친북좌파와 한미일동맹파의 내전』, 기파랑, 2006.]
6 山崎雅弘, 『歴史戦と思想戦−歴史問題の読み解き方』, 集英社新書, 2019, 7-8쪽.
7 위의 책, 4쪽.
8 조우석, 「좌파라 말하지 말라, 날뛰는 반대한민국 세력에 두 눈 뜨자」. 『뉴스타운』, 2022.1.26.
9 조우석, 「80년대 재인식 없이 대한민국 내일 없다」. 『스카이데일리』, 2023.7.18.
10 「한국의 독자들에게」 및 「감사의 말」,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 7-8쪽,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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