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정세특집2] 다극화 한 참혹한 퇴락 앞에서 내뱉는 절규: 전쟁 위험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살아가는 코리아‘들’에게 고함
이유철(서울대학교)
전간기의 기시감, 다극화질서
제1, 2차 세계대전은 인간 이성의 참혹한 퇴락(頹落)을 상징한다. 전쟁 뒤 인류는 그 실패를 반성하고 성찰해왔다. 전간기(戰間期), 전후 혼란의 시기, 서양철학자들은 존재론(ontology)을 처방전으로 제시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도 그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차대전에서 경험한 야만적 폭력은 ‘이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신앙, 다시 말해 서양 문명이 힘겹게 일구어낸 ‘이성의 세계’를 무너뜨렸고, 그 충격은 다시금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 셈이다. 근대 서양 철학이 전제한 합리적이고 독립된 개인, 즉 임마누엘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서 필사적으로 구원하고자 했던 ‘주체’가 소실되어가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의 ‘존재 에 대한 물음’은 서양철학이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한 이성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따라서 그 자체는 결국 인간 이성을 놓지 못하는 서구인들의 절규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퇴락(Verfall)”, 다시 말해 인간이 마주한 현실은 (도구적) 이성의 극단적 전개에 의한 인간성 상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관심과 구원을 위한 시도는 제2차대전을 피하기는 커녕 이에 복무하며 인간을 절망으로 이끈다. 제2차대전 후 역사는 팍스 브리테니카 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 대체되며, 제1차대전 후 자유방임주의로의 복귀를 예상한 월터 리프먼의 낙관은 희망찬 전후 국제질서를 상상하였으나, 전후 질서는 자유주의 적 세계가 아닌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의 세계, 냉전체제로 대체되었다. 한 축 의 세계가 무너질 때까지 국제정치질서는 여전히 군사적 긴장 속에서 왜곡된 세계에 서 살아온 것일 뿐이었다. 이는 현재 국제정치 질서변화의 계기에 서서 절망과 구원 사이가 아닌, 절망과 절망 사이를 주목해야 이유이다.
제2차대전 이후, 절망과 절망사이에 주목한 이가 바로 에드워드 할렛 카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20년의 위기(The Twenty Years’ Crisis, 1919~1939)』는 당시 전간기 20년, 절망과 절망 사이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과거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시대착오일 뿐이다. 역사는 진로를 거꾸로 되돌리는 법이 없다.”1)
따라서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지탱해온 미국 중심의 단극질서가 종말해 가고 있는 다양한 근거를 준거로 삼아 구냉전과 ‘신’냉전의 계기 사이, 탈냉전 이후 30년을 ‘30년의 위기’2)로 다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간기 아름다운 시절(Belle Époque)에서 비롯된 이상주의와 낙관주의가 불러온 또 다른 혼란이 있었다. 그리고 탈냉전시기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의 번영과 평화가 30년간 축적되어온 증상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현재 두번의 전쟁 이후, 다시금 인간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자유주의 규범화의 노력은 파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단극적 패권질서 퇴락의 계기들
포스트 제2차대전, 사실 그것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도래가 아닌 대립의 양극 질서, 즉 냉전이었다. 미국의 정치운동과 사상의 계보학은 냉전 위에 세워진 팍스 아메리카나, 그리고 그 해체의 서사다. 전후 탈(de-)식민을 주도한 미국의 자유주의적 규범화된 권력은 인간성의 퇴락을 ‘조작된(규범화된)’ 이성에 의해 가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양극적 권력 대립과 전쟁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키는 한편, 이것들을 정당화(legitimation)했다. 미국의 규범승리를 등에 업은 미국은 자연스레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주변부에 대한 ‘정당한(justice)’ 개입을 시도한다. 전 세계를 하나의 이념 혹은 하나의 합리적 계산에 의해서 운영하고자 한, 이런 미국의 생각은 오만함은 아니었을까? 자유 ‘계몽주의’적 거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에 기반한 자유주의 세계혁명은 냉전체제라는 강한 자기장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자유주의 개입 프로젝트는 기실 파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백래시로 이어졌다. 그들이 심은 사회공학적 자유주의적 씨앗은 지금 현재 권력의 빈 공간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전쟁들을 낳고 있다.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우리가 직면한 것은 한 세기 반 동안 정치적, 경제적 생각을 지배해 온 도덕률의 철저한 붕괴이다. (…) 각국이 전 세계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동시에 개별국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불가능했고, 개별국가의 이득을 추구함으로써 세계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오늘날 세계위기의 내부적 의의는 이익의 조화에 기반한 이상주의의 전체 구조가 붕괴했다는 점이다.3)
그 증상들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벌어진 “비상상황의 윤리(supreme emergency)”4) 는 전후 쌓아 올린 자유주의 규범에 큰 균열을 내었고, 2008년 미국 모기지 리스크로 시작되었고, 미국에서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일컬어지는 글로벌금융위기와 그 이후의 미국의 일방적 행보는 모두를 실망시켰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로 대변되는 경제적 번영과 평화의 탈냉전의 전성기는 서서히 그 수명을 모두 소진 해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Pivot to Asia)”과 이후 더욱 확장된 형태로 진화 한 인도-태평양으로의 전략적 축 이동은 소진된 물리력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온갖 군사적, 정치경제학적 국가정책(statecraft)을 레버리지 삼아 글로벌 불 균형을 회복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대륙을 봉쇄하고 강제적으로 달러 환류체제를 복구해야 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도-태평양이라는 갈등의 공간을 부상시키는 동시에 중국과의 제 긴장을 통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최종 전략적 종착지라 하겠다.
이를 위한 시도들, 즉 정치군사적 시도로는 4자 안보대화(QUAD)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 영국, 호주 3자 안보 파트너십(AUKUS) 즉 3각 군사동맹, 정치경 제적으로는 보호무역주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그것이다. 트럼프-바이든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행보는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심화 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팬데믹 이후 국제분업체제의 위기를 겪으며 미국적 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뚜렷한 하강 국면5)들을 마주하고 있어온 것일 뿐이었다.
제1차대전을 끝내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낭만과 극단적 대비, 제2차대전은 결국 강대국들 간 갈등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 당시 1930년대 전세계를 절망 시킨 대공황을 잊게 하였다. 1930년대 대공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들이 만들어 낸 파운드, 프랑, 달러 등에 기반한 식민지 경제블록화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무엇인가. 현재의 프랜드 쇼어링, 얼라이 쇼어링 그리고 브릭스(BRICS)가 아른거리는 것은 그저 착각일 뿐인가.6)
2025년 세번째 같은 질문지, 그리고 다시 트럼프
전간기 “첫 10년간의 온갖 희망 (…) 다음 10년간의 엄청난 절망”7)을 불러 왔듯이 달콤하기만 했던 탈냉전 약 20년의 경제적 호황과 평화는 반전의 20년의 절망을 불러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만 가득하다. 미국의 자유주의 확산의 사회 공학적 프로젝트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집권(2020), 우크라이나 전쟁(2022)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2023)과 시리아 붕괴(2024), 확대 일로를 보여주는 이스라엘-이란의 긴장을 중심으로 한 중동의 위기 고조(2024) 등은 “거대한 환상(great illusion)”8)들을 강화(escalation)시키고 있을 뿐이다. 누적되어 온 위기 증상들은 백래시로 전세계 곳곳에 균열의 틈을 벌리며 거대한 지층을 뒤 흔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전간기 이상주의 시대에 돌이킬 수 없는 사망신고를 내렸던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확실히 종식되었음을 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다시금 우울한 현실주의에 의해 잘 설명되는 시공간으로[의] 회귀”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권국가 간 전쟁이 상존하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넘어 칸트의 전통을 향유하는 세계정치의 미래로서 표상화 된 공간이 붕괴하고, 전 지구적으로는 군비 경쟁과 안보 딜레마가 상존하며 핵무기 터부마저 위기에 처한 현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소한 자유주의적 규범을 확산시켜 온 미국이 유엔 헌장 2조 4항과 7항을 주장하고, 여전히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러시아가 “비상상황”9)과 인도주의법에 기반한 “개입”10)이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모순적 상황은 미국적 자유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규범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11)
“모든 회원국은 그 국제관계에 있어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하 여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양립하지 아니하는 어떠한 기타 방식으로도 무력의 위협이 나 무력행사를 삼간다(유엔헌장 2조 4항)”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본질상 어떤 국가의 국내 관할권 안에 있는 사항에 간섭할 권한을 국제연합에 부여하지 아니한다 (유엔헌장 2조 7항)”
우크라이나 전쟁이 전하고 있는 것은 매우 분명한 메세지다. 범세계주의(cosmopolitanism)와 단선적 사회 진보론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 건설 계획이라는 국제정치에 대한 일종의 자유주의적 사회공학적 상상력은 비극적 결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전간기의 기시감은 2024년 미국은 세 번째 같은 질문지에 똑같은 선택지를 받아 든 결과에 달리게 되었다. 2025년 트럼프의 재집권은 이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바이든 행정부가 “교란”되어버린 세계(트럼프의 파괴적 유산)를 “회복”시켰는가, 혹은 그 회복이 미국 국민들에게 “안정”을 주었는가, 아니면 ‘미국 우선주의’를 원하는가의 투표라는 점에서, 지난 두 번의 대선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선거다. 하지만 이 질문지의 선택지는 이전과 정말 같을까? 지난 4년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에서 ‘아메리카 투게더(America Together)’로 변화하려는 시도였지만, 그것이 ‘아메리카 얼론(America Alone)’에서 벗어나도록 했을지언정, 연성권력에 기반한 ‘아메리카 온리(America Only)’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현격하게 줄었고 되돌리기도 쉽지 않은 형국이다. 그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 의 출범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대전환기의 도래는 절대적 이익도, 상대적 이익도 보장하지 못하는 시대가 “정치적, 경제적 생각을 지배해 온 도덕률의 철저한 붕괴”12)와 함께 냉전적 세계관을 소환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불안정성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물리적 반작용은 아닐까? 지그문드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 (Retrotopia)』(2017, 아르테)를 통해 과 거의 향수에 젖어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현 세태(世態)를 비판한다. “지난 과거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시대착오”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망각된 과거의 향수는 선동가들에 의해 익숙한 정치 구호가 되었다. “우리의 나라를 되찾자 (Take Our Country Back, Reform UK)”,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 2016)” 나아가 “미국을 그 어느 때보다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er than Ever Before“ 트럼프, 2024)”등의 구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며 그것이 역사의 퇴보가 아닌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오른편 극단에서 강하게 흘러 나오고 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 진보라는 태풍에 미래로 떠밀려 가는 ‘천사’를 통해 진보사관(idea of progress)을 비판했듯이, 선동가들은 현재가 된 그 미래의 지옥 같은 현실은 인간의 망각에 기대어 어쩌면 더욱 끔찍했을지도 모르는 과거를 유토피아 삼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꿈 꾸는 미래’가 ‘과거’가 되고 만 지금이야 말로 진정 위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를 위한 대비는 필요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드는 현재에 서 미래의 ‘새로운’ 유토피아, 즉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권력의 이완으로 폭로된 위선과 두 개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전선에 올라타기 보다, 현실을 재인식하고 간극을 찾아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 ‘새로운 유토피아’는 ‘과거의 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존재한 유토피아의 종말은 “새로운 유토피아의 건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다시 묻는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탈단극의 계기, 동아시아와 한반도
동아시아 지역 구조의 균열을 심화시키고 있다. 특히 이는 한국의 전략적 딜레마를 가중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분단이라는 취약한 단층대에 있는 한국 이 미국-중국 각각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질서가 만들어내는 균열점 위에 선 꼴이다. 물론 취약성은 안보로 상징화될 뿐 경제적 불안정 측면에서는 즉각적이고 강력한 충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혹자는 한국이 마주한 상황을 “명청 교체기나 구한말에 비유할 만한 근본적인 시대 변화” 국면이라고 말한다.13) 지금 시대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 외교 정책 패러다임 전반에 대한 재고는 지극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어떤 구조변동을 경험하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힘에 의해 규정되는 국제정치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지난 100년간 발전해 온 국제정치의 이론들은 단극적 패권질서에 기댄 현상 설명적 이론들에 불과했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이미 다극적 분화가 태동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실증적 고증을 담은 패턴화 된 미래 예측 가능한 국제정치의 인식론은 당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 조건이 바뀌면, 현상도 변화하기 마련이 다. 지난 몇 년 사이 북한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이 되었고, 남한이 대한민국이 되었듯 말이다.
다극화하는 국제질서는 권력구조를 변화시켰고, 분화의 순간은 단극적 패권질서 에서 허용될 수 없는 공백을 낳을 수밖에 없다. 다극화 질서는 “각자도생”이 제1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에서 세력균형의 편승은 생존을 의탁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는 첨예한 갈등선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 국의 쇠퇴는 권력의 공백을 허락했고, 한반도 38선 북단에서는 각자도생의 길에서 러시아를 선택하며 세력균형에 생존을 의탁했다. 그 동안 스스로가 변수가 되고자 한 자주노선을 포기한 ‘북조선’이 되었다. 이로서 미국에 운명을 의탁한 한국과 함께 한반도는 완전한 세력균형을 스스로 구성해 내고 말았다. 지난 “한반도의 봄”이 이렇게나 후회스러울 수가 있을까.
북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지난 시기, 냉전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가 서로 대결하며 자신의 규범과 그에 기반한 통일을 주장했으나, 각각은 사실 북녘에서 구성되어 온 사회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었던가? 한반도의 봄은 이를 확인하는 계기는 아니었을까? 다름과 차이를 동일성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폭력과 갈등 그리고 불신으로 귀결되었다.
다극화하는 국제질서 하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구상할 수 있는 자유, 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은 한층 더 멀어지고 말았다. 결정적 순간 자기생존을 택한 한민족은 각각의 국가로 남기로 한 듯 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지금은”이라는 아쉬움으로 남겨 둘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영원할 수도 있는” 상태라는 서운함이 현재 한민족 “두 국가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더 이상의 전통적 통일 담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미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희미해진 기억의 끈은 더 이상 남북을 이어낼 수 있는 자기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 뿐이겠는가, 신자유주의적 삶의 벼랑 끝에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삶은 나의 이익과 그것과 관계 없는 것으로 구분되어 점점 멀어질 뿐이다.
전환기 다극적 질서 앞에서 한반도에 “통일”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 희망이 사치이고, 영원할 수 있는 두 국가들 사이에서 한 민족 담론은 웃프다. 한국은 미국에 의탁한지 오래이고, 북한은 북조선이 되어 러시아에 자신들의 안전을 일부(?) 의탁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두 국가들 사이에 초월적(transcending) 통일 담론이 필요한 시점은 아닌가.
전환기 국제정치와 한국의 인식론적 전환
다극화는 세력균형에 편승하거나 의탁하기 위해 반드시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때로는 힘의 공백을 발생시킬 수 있겠으나, 동시에 권력은 그 진공상태를 결코 오래 두지 않는다. 따라서 더욱 기민하고 강대국의 변수에 편승한 국제정 치 인식론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 동안의 국제정치관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의 변수에 따라 남북한 간 전략과 전술이 구사되었다면, 지금은 우리의 자결권을 가 지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게다가 대한민국과 북조선의 관계가 된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지형은 더욱이 그러하다. 즉, 남북을 재규정하고, 위치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정치의 주관적 인식론을 스스로 구성해 내야 한다. 서세동점의 근대화가 아닌, 우리의 국제정치 인식론을 가지고 다시금 우리의 눈으로 동아시아를 재편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분단을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보편담론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를 공유한 하나의 연대 주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환기적 다극화 질서에서 지금까지의 세력균형은 의미가 없다. 타국과 자 국의 국익에 대한 동일화에서 벗어나, 자국의 이익에서 타국과의 연대, 그리고 그 연대들을 통한 공간의 창출이 필요한 때이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생명력이 소진되어가는 지금, 냉전적 인식론을 억제하고 우리 스스로를 주체화 시켜 타국의 이익과 구분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의 국제정치에 대한 인식론이 되어야만 한다. 최소한 탈식민적 토대 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중동 전쟁은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1) E. H. 카아, 『20년의 위기』, 녹문당, 2000.
2) 차태서, 『30년의 위기: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4.
3) E. H. 카아, 앞의 책, p. 87.
4) Michael Walzer, Just and Unjust Wars: A Moral Argument with Historical Illustrations. New York: Basic Books, 1977.
5) 차태서, 「탈자유주의적 역사로의 가속화? 포스트-코로나, 포스트-트럼프 시대 미국외교와 세계질서 읽기」, 『국제지역연구』 30권 1호, 2021, 1-39.
6) 이유철,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과 신냉전의 안보: 신식민주의적 경제블록화」, 『뉴래디컬리뷰』 2권 4호, 2022, 92-112.
7) E. H. 카아, 앞의 책, p. 265.
8)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출판업자, 반전주의자였던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은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는 유럽국가 들은 전쟁이 무익함을 강조하며 이를 거대한 환상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썼다. Norman Angell, The Great Illusion, Whitefish: Kessinger Publishing, 2010.
9) Michael walzer, 앞의 책 p.122.
10) 코소보에 대한 NATO의 개입당시 제기된 긴급구호의 논리적 맥락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Habermas, Jürgen, Time of Transitions, Cambridge: Polity, 2006, pp. 37-38.
11) 이유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국제질서와 규범의 대립: 지배의 윤리에서 초월적 규범으로」, 『국제정치논총』 62권 4호, 2022, pp. 7-56.
12) E. H. 카아, 앞의 책, p. 87.
13) 차태서, 앞의 책. p.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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