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내전상황 특집3] 혐중은 어떻게 극우의 무기가 되었는가?
김희교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1. 반중정서와 혐중의 차이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극우들의 중국혐오는 이미 백색테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감행할 수준에 도달했다. 지하철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남성들이 중국동포로 보이는 가족에게 “짱깨새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로 위협하는 일이 벌어진다. 탄핵반대 집회 근처에서는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너 조선족이지?”라며 고압적 폭력을 행사 하는 경우도 허다하게 발생한다. 남태령대첩에서 발언대에 올랐던 “중국인 부모 아래서 태어났고 현재는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에게 ‘CIA에 신고하겠다’ ‘너는 간첩’ 등의 협박이 쏟아졌다. 한국은 이미 혐오의 최종단계인 폭력화 단계까지 진입했다.
혐오는 대략 세 단계의 진화과정을 거친다. 1단계는 감정이나 정서로 존재하는 단계이다. 노무현정부 시기만 해도 반중감정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2004년 5월 동아일보의 조사에 따르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61.6%에 달했다. 미국이라 답한 것은 26.2%에 불과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외교안보 측면에서 중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48.8%로 미국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견보다 약 10% 더 높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반중 감정이 고양된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년도 채 안된다. 1단계 혐오의 특징은 유동성이다. 사안에 따라 움직이고 휘발성도 강해서 별로 염려스러운 단계는 아니다. 어느 시기 어느 국가에서도 존재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혐오의 2단계는 혐오주의로 고착화되는 혐중단계이다. 감정이나 정서 차원에 머물던 혐오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는 단계이다. 이 때 차용되는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이다. 미국의 반인종주의 운동가 이브람 X. 켄디는 인종이란 단순히 피부 색깔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차이가 수집되고 병합되어 만들어진 권력구성체”라고 정의한다. 인종주의가 진화하여 이제는 단순히 피부색깔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서구의 인종주의를 차용하여 중국을 타자화 시키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한국 보수의 반중감정이 혐중단계로 들어서는 계기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중국의 부상이 가져온 보수의 위기였다. 한국 보수주의는 반공주의, 친미주의, 그리고 경제지상주의를 그들의 핵심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한중관계의 고도화는 보수의 핵심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약화시켰다. 적대적 관계를 기반으로 삼는 반공주의는 양국 사이의 다면적 교류로 약화되었고, 지속적인 대중 무역 흑자는 경제적으로 꼭 미국이 아니어도 되는 상황을 발생시켰다.
이명박 시기에 등장한 뉴라이트는 반중정서를 반중 혐오로 이끌어 간 대표적인 집단이다. 극우 보수 기독교 집단들이 중심이 된 그들은 국익을 희생해서라도 친미주의와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일본의 극우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재구축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정부는 뉴라이트 세력을 육성한 장본인이었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념보다는 경제적 이익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의 보수주의는 안보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보수주의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안보주의가 자유무역을 중시했다면 안보적 보수주의는 이른바 경제를 안보에 희생시키는 경제안보를 중시했다.
한국의 안보적 보수주의는 2012년부터 개시된 미국의 반중정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반중정서를 반중혐오로 이데올로기화 시키기 시작했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이 제시한 부상한 중국을 인정하고 세계경영에 중국의 역할을 부여하는 중국의 ‘신형대국관계’ 요청을 거부하고 이른바 아시아회귀정책을 감행했다. 아시아회귀정책의 핵심은 중국을 봉쇄하는 신냉전전략이었다. 이때부터 미국에서도 반중감정이 반중혐오로 급속도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오바마 1기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인들의 반중감정은 노무현 시기 한국인들과 유사한 우호적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는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뉴라이트 세력에게는 천군만마를 만난 기회로 작용했다.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 낸 북미대화는 한국의 보수주의에게는 위기였다면 한국의 극우에게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보수에게 그것은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극우는 보수주의의 위기를 서구 극우들이 사용하는 인종주의적 혐오와 군사주의적 신냉전 전략을 가져와 대처하고자 했다. 북미대화는 보수의 극우화가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극우는 북한 대신 중국을 그들의 신냉전 전략의 좋은 먹잇감으로 삼았다.
2. 왜 혐중주의자들은 행동하기 시작했을까?
혐오의 최종단계는 인종주의적 혐오주의자들이 군사주의를 채용하여 행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혐오한다고 해서 반드시 폭력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종주의자라고 해서 누구나 거리에서 다른 인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폭력으로 전이되는 데는 결정적인 인화점이 필요하다.
윤석열정부는 뉴라이트 계열의 극우와 손을 잡고 혐중주의를 정책으로 채택했다. 그는 당선되자 마자 경제적으로 탈중국을 선언했다. 정치적으로 바이든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올인함으로써 미국의 신냉전 전략에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군사적으로는 일본의 극우와 손잡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그 모든 화살은 중국 혐오를 겨냥하고 있었다.
윤석열 탄핵은 한국 보수주의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극우의 위기였다. 한국의 보 수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만큼 위기에 처했고, 한국의 극우는 그들 세력 확산의 근거지를 단순간에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극우가 혐중주의를 행동화하는 인화점이 되었다.
투표와 법으로 그들의 권력이 유지될 수 없을 때 동원되는 것이 군사주의이다. 극우들 사이에 싸움의 기술로 회자되는 ‘초한전(超限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겠다는 극단주의적 방법이다. 그들은 내란을 성공하기 위해 외환을 만들고자 했다. 그들에게 중국 혐오는 외환을 일으키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지금껏 한국의 보수가 내란을 성공하기 위해 외환으로 동원한 것은 북한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제 중도층에게도 먹혀들어가지 않는 철 지난 레퍼토리이다. 이번에는 북한조차도 협조해주지 않았다. 연평도 앞바다에서 총을 쏘고, 평양 상공에 무인기를 띄워도 북러신동맹으로 숨통을 틔운 북한은 극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중국 혐오는 이미 잘 다듬어 놓은 생선같은 외환의 먹잇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을 당하고 난 이후에도 중국 혐오라는 약을 팔았다. 그는 중국을 국가보안법의 대상으로 포함시켜 적성국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반국가세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국가세력이 집권하면 “중국산 태양광 시설들이 전국의 산림을 파괴 할 것”이라는 비상식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혐중주의자들을 동원해 내란을 지속하기 위한 일종의 술책이었다.
짧은 기간 안에 중국 혐오가 인종주의적 폭력으로까지 나타나게 된 데는 보수 진영 내에서 청산되지 않은 식민주의 때문이었다. 유럽의 인종주의가 제국의 인종주의적 식민주의라면 한국 극우의 식민주의는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에 남아있는 식민성에 기반한 종속적 식민주의이다. 타율적 해방을 맞이한 우리 안에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가 남아있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 힘으로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채 일본에 식민화되는 방식으로 근대에 편입되었다.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은 극도의 혐중론을 확산했고, 조선의 친일파들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 선봉장들이었다. 몽둥이로 화교 수백명을 때려죽인 만보산사건은 그런 식민성이 표출된 인종주의적 폭력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타율적 해방으로 인해 식민주의의 일환인 혐중주의는 한중 수교로 만들어진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채 잠재되어 있었다. 그것을 무덤에서 꺼내 부활시킨 것은 친일을 내세우고 있었던 뉴라이트 세력이었다. 한국의 극우들이 이상하리 만치 민족주의적 정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식민성 때문이다. 이것이 제국의 우익들과 결정적 차이이다.
3. 중도는 왜 반중정서에 가담하나?
‘중국이 좋냐 싫으냐’라는 식의 인종주의적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하면 지금 한국민의 약 80% 정도가 싫다고 답한다. 북한보다도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진영을 보통 진보 30%, 보수 30%, 중도 40%라고 본다면 상당수의 중도와 일부 진보진영이 반중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한국의 중도진영의 상당수 가 반중정서를 가지고 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부상하는 중국이 그들의 실익에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도층 상당 정도는 경제적 보수주의자이다. 이념보다 실익이 우선된다. 노무현정부 때 중도의 상당 수가 친중적으로 변한 이유도 중국이 그들의 실익에 도움 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략 이명박정부 시기 때부터 중국상품이 경쟁력을 가지면서 우리의 실익을 침해하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적 감정이다. 중국은 부상하는 강대국이다. 이웃에 부상하는 강대국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좋아할 국가는 별로 없다. 특히 중국은 단순한 강대국 이 아니다. G2라고 불릴만큼 강성대국화되었다. 군대가 현대화되고, 자체적인 인공 위성을 쏘고, 유엔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우리에게 편할 리가 없었다.
세 번째는 중국이 강성해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사용해오던 고구려사를 그들도 같이 사용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한국에 사드를 설치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대응조치를 취했다. 우리는 강성한 중국을 상대한 경험이 없었다.
네 번째는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넷민족이라는 점이다. 책이나 신문 대신 포털과 숏폼, 그리고 유튜브에서 중국에 관한 정보를 획득한다. 새로운 언론환경은 기성 언론조차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한국의 일부 언론은 김치는 중국에서 있었다는 몇몇 중국 유튜버들의 주장을 김치공정이라는 국가 프로젝트처럼 만들어 가기도 했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혐오를 조장하는 기사가 늘 우선적으로 클릭되는 환경에 놓여있다. 중국 혐오는 그런 언론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다섯 번째는 우리가 아직 변화하는 세계 체제에 걸맞는 중국관을 아직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 30년간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하는 안미경중 시스템 하에서 살았다. 그러나 미국이 미‧중간의 합의된 전후체제를 무너뜨리고 신냉전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신냉전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내기 힘든 시기이다. 중국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도 마찬가지로 알기 힘든 시기이다. 위기는 늘 공포를 만들어 낸다.
여섯 번째는 우리 식의 근대화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율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어왔다. 제국은 모델을 제시하고 우리는 수용하고 적응하며 생존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는 그 문제 한 복판에 놓여 있다.
달리는 기차에서는 중립은 없다. 위기가 엄습하고 있는, 길이 없는 시기 나타나는 공포는 누군가에 의해 혐오로 진화한다. 중도진영이 막연히 중국이 나쁘다거나 중국 인이 싫다는 식의 반중감정 상태에 놓여 있을 때 극우들이 혐중을 치켜세우고 끊임없이 가짜 뉴스를 양상해나갔다. 지금 한국의 중도는 극우에 포획되기 십상인 상태 에 놓여 있다. 막연한 반중감정을 현실적 대안으로 대체하는 중국관을 만들어 제시하지 않으면 반중감정은 중국 혐오로 진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이다. 이미 그들은 한 발을 인종주의 혐오 쪽으로 들여 놓고 있다.
4. 진보는 왜 중국 혐오에 무관심할까?
하워드 진은 “세계는 소란했지만 우리는 항상 그 바깥에 있었다”고 미국 학계의 파편화된 지식을 비판했다. 극우가 혐중을 행동화하는 데는 진보진영의 책임도 있다. 반중정서와 반중혐오의 사이의 간극에는 진보진영의 침묵이 존재한다. 중국 혐오 문제는 어떤 사회적 이슈에 비해 진보진영의 관심이 낮다. 지금 중국 혐오는 진보 진영이 나서지 않으면 극우가 이길 수 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구축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미 극우의 알고리즘에 포섭되어 있다.
한국의 극우는 이미 총으로 국회를 장악하고, 판결이 마음에 안들면 사법부를 탈 취하고, 백주대낮에 중국인 관광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고 있다. 미국 사회가 인종주의 국가를 만드는데 흑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면 한국 극우는 혐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이 원하는 인종주의 국가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고 있다. 극우가 중도층을 혐오로 끌고 가고 있는데 그것을 견인하는 전선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고 그것과 싸우는 세력도 없다.
미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샴보가 규정한 대로 중국은 여전히 불완전한 강대국이다. 문제 투성이라는 이야기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타락한 사회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잠재적 제국주의 국가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자 관점에서보면 위협적인 강성대국이고, 부상하는 경제 대국으로 존재 그 자체로 한국에 위협적이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권위주의 체제이며, 일당국가이고, 통제국가이고, 억압 국가이기도 하다. 환경론자의 관점에서 보면 최대의 이산화탄소 배출 국가이기도 하고, 원전의 비중이 높은 국가이기도 하며, 여전히 고도성장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이 그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하나의 세계로 불릴만큼 다면적 국가이다. 국가가 나서서 대부분의 이익을 독점하는 빅테크 기업과 플랫폼 기업을 규제하고 그 이익을 가난한 지방정부에 나누어주기도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킨 중동에서 팔레스타인을 뭉칠 수 있도록 중재하기도 하고, 이란과 사우디의 수교를 끌어내기도 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중국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느 국가보다도 탈탄소 국가로 지향하는 속도가 빠른 국가이기도 하다. 전기차, 태양광, 풍력발전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이유는 성장보다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국가 전략을 수정한 결과이기도 하다.
중국의 문제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일단 맡기자. 지금은 우리의 문제를 우선해야 하는 시기이다. 우리의 문제는 지금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무엇을 어떻게 말하느냐 이다. 한국의 진보는 지금 중국의 문제를 나열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지 않는가 자문해야 한다. 중국의 문제를 나열한다고 중국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문제를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문제를 말하는데 그치지 말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비스 하비가 주장한 대로 추상적 보편주의는 늘 제국적 야망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추상적 보편주의는 늘 주류의 프레임과 아젠다에 종속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중국의 프레임과 아젠다는 한국의 보수주의가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주류이다. 그들과 달리 혐오하지 않고 중국을 말하고 상대하는 방법을 고민해서 제시하고 프레임과 아젠다를 진보적으로 끌고와야 할 시점이다.
5. 중국 혐오의 손익계산서
중국 혐오의 피해자는 결코 중국이 아니다. 거리를 걷는 중국인 관광객을 폭행하면 몇몇의 중국인들이 피해를 입겠지만 한국은 그보다 훨씬 큰 피해를 본다. 2024년 한국에 온 중국인 관광객은 350만명이었다. 2위인 일본에 비해 100만 명 이상이 더 왔다. 중국인 관광객은 1인당 소비금액도 1위이다. 팬데믹 때 명동거리를 걸어 본적이 있는가? 중국인 관광객들이 오지 않아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중소상인들의 생계와 연계되어 있다. 이제 겨우 원상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정부의 탈중국 정책에 가장 피해를 본 계층이 중소상인들이다. 탄핵 국면과 길거리 관광객 폭행이 어우러져 중국외교부는 한국 여행주의보를 내렸다. 아마도 당분간 중국 여행객은 대폭 줄 것이다.
극우들은 거리를 걷는 중국인을 폭행하면 중국인만 피해를 당하고 중국만 적대적 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혐오는 가리키는 방향이 없다. 혐오를 지휘하는 세력이 방향을 바꾸면 언제든지 다른 국적의 국민들로, 2030 여성으로, 이주민으로 바뀔 수 있다.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아는 국가는 이미 인종주의 혐오를 경험한 국가들이다. 극우가 거리에서 외국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캐나다도 이미 한국 여행주의보를 내렸다.
지금 수많은 외국 여행객들이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한국이 k-culture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k-pop을 듣고, k-드라마를 본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는 이유는 멋진 나라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가보고 싶고, 박수쳐주고 싶고, 살고 싶은 나라이다. 놀라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나라이고,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를 구축한 존경스러운 나라이며, 24시간 거리를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안전한 국가이기에 그들이 이곳에 온다.
수출로 먹고 살아온 한국의 미래 먹거리는 무엇인가? 제조업의 경쟁력이 날로 쇠퇴해가는 한국이 직면한 질문이다. 단언컨대 지금 한국은 문화제국이다. k-pop과 k-culture는 여전히 전세계의 표준이 되고 세계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나가고 있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는 아마도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극우의 혐중의 행동화는 그런 미래를 좀먹고 있다.
중국혐오는 중국이라는 상대 국가가 있는 싸움이다. 중국에서 한국문제를 이야기 하며 먹고사는 한 팟캐스트 진행자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교수님, 중국을 혐오하는 싸움판이 한국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지금 한국에서 100명이 중국을 혐오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중국에서는 수천명의 한국 혐오자가 생기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한중우호를 위해 노력하는 중국인이다. 그의 결론은 이런 종류의 싸움은 한국이 결코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딥시크라는 중국 AI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혁신의 기지이다. 달 뒷면을 탐사하는 우주선이 오가고 있고, 전기차는 이미 세계 판매 1위를 차지했다. 가성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 수많은 혁신이 들어있다. 이미 한국 시장을 점령한 로봇 청소기를 보면 그들의 혁신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는 지 알 수 있다.
미국에 이어 또 하나 등장한 혁신의 기지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혐오로 비난하고 그들의 혁신에 눈감는 일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하루가 멀다하고 딥시크를 정보유출을 핑계로 차단하고 있을 때 미국의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정부의 정책과 상관없이 딥시크를 그들의 플랫폼에 올렸다. 그 중에는 딥시크의 가장 큰 경쟁자인 마이크로소프트도 있었다.
6. 중국 혐오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지금은 보수가 그들의 권력을 재구축하려고 하는 반동의 시기이다. 탄핵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인종주의적 혐오는 지속될 것이다. 극우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대항 권력의 구축이 시급하다. 극우의 혐중 프레임에 대항하는 진보적 중국담론을 형성해야 할 때이다.
지금 진보진영은 탈식민주의적 실천성이란 쉽지않은 과제를 시작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냉전 시대의 새우로 행세해서는 안된다. 탈식민주의적 실천성은 탈식민주의 연구자 월터 D.미뇰료가 규정한 “제국적 차이와 식민적 차이를 고려한 지식의 지정학적 고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미뇰료의 주장을 재해석 해보면 1) 지정학적 고려란 제국이나 식민국가의 관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관점 즉 지역민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고, 2) 제국적 차이란 식민권력 사이의 차이를 파악해야 한다는 뜻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억압의 차이를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며, 3) 식민적 차이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다양한 식민주의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극우가 끌고가는 혐중과 중도가 가지고 있는 반중정서 사이에서 진보의 역할을 만들어 내야 한다.
친미냐 친중이냐 하는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와는 이제 청산해야 한다. 한 국가를 단위로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묻고 분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종주의적 사고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나라이다. 그것을 국가간 관계인식에도 차용해야 한다. 미국도 문제지만 중국도 문제라는 진보적 프레임과 극우의 중국 혐오 사이에는 상호 공존의 공간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시인 에메페르낭 세제르는 이미 유럽의 자유주의적 가치는 식민주의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런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주의와 실천적으로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이냐 중국이냐로 물을 것이 아니라 반도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문제여서 중국이 문제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것은 문제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면 극우의 혐중주의에 전유당하기 쉽다. 더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행동해야 한다. 켄디는 반인종주의자는 인종주의자를 대하는 감정이나 태도, 인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종주의 정책이나 권력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인종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문제여서 중국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누군가는 대안을 제시하며 싸워야 한다. 그들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우는 실천적 진영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인종주의적 국가로 나아 가지 않을 수 있다. 실천적 싸움이란 단지 행동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동으로 구체적인 진보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 시킬 수 있는 싸움의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그럴 힘이 있고, 그런 세상을 원하는 시민들이 이미 광장을 채우고 있다.
지금 우리는 단순히 극우들의 폭동이나 내란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미완의 근대와 싸우고 있다. 탄핵 광장에 등장한 전혀 새로운 근대적 주체가 승리한다면 지난 100년간 이루지 못한 우리의 근대는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 다면 우리는 기존의 보수주의에 인종주의와 군사주의로 무장된 한국적 극우들의 반동의 세기를 살 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빛의 혁명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큰 세 기적 싸움이다. 혐오하지 않고 중국을 상대하는 법부터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 이다. 그렇게 빛의 혁명은 하나씩 완성되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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