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와 논점] 2010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성공한 이유 : 주요 요인 분석
신석진(연구원장) 김수림(연구원)
진보당은 중앙위원회(2024. 9. 22.)를 통해 ‘2026년 지방선거에서 최소 150명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재연 상임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2010년 지방선거 수준인 150명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해 진보정치 전성기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기준과 목표는 ‘2010년 민주노동당의 지방선거 성적표’와 ‘확고한 3당지위’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분당과 탄압, 야당난립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진보정당의 지방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당선자를 배출했다. 기초단체장 3명, 광역의원 24명, 기초의원 115명을 합쳐 142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총 447명의 본선출마자 중 32%가 당선됐다. 성공한 이유와 주요요인은 무엇일까? 14년 이나 흘러 소수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온 당시 상황을 다시 살펴본다.

2010년의 민주노동당은 2008년 분당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다. 노회찬, 심상정 등 대표정치인들의 탈당이 있었고 그들을 지지했던 당원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1만명 규모의 대규모 탈당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이어 입당 사실 만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던 영화감독 봉준호, 박찬욱씨와 배우 문소리씨 등 유명 영화인들의 소리없는 탈당도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이들의 탈당소식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명박정권의 파상적인 탄압공세까지 더해져 안팎으로 고통에 짓눌렸다. 교사·공무원의 정치활동금지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소속 후원당원(당우라고 불렸음)들이 연이어 검찰에 불려갔고 그 들 중 무려 273명이 기소되었다. 많은 이들이 ‘진보정당 전성기는 끝났다’는 체념의 목소리가 나왔다. 노동현장, 시민사회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시민들 내에서도 분열에 대한 실망과 우려가 뒤섞인 한탄이 쏟아졌다. 여기에 더해 보수:개혁:진보의 이른바 2강1중 구도도 흔들렸다. 민주노동당의 오른쪽에는 국민참여당(유시민계)이, 왼쪽에는 진보신당이 출현했다. 세개의 당이 진보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했다.
10% 안팎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매년 급락하여 2~4%대에서 공회전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의 배타적인 지지는 진보신당 활동을 원하는 적지 않은 노동조합간부들에 의해서 사실상 유명무실화됐다. 2010년 민주노동당의 성공은 이런 악조건에서 거두어 낸 것이다. 성공의 주요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큰 줄기는 ‘자강(自强)’, 즉 자체 역량강화였다. 세부적으로 당원들의 결집과 내부 결속력 강화, 선명한 반(反) MB투쟁, 인물난 자력 해소, 야권연대에 대한 헌신 등 4가지 요인으로 분석했다.
- 당원들의 결집과 내부 결속력 강화
2008년 2월 민주노동당의 집단 탈당과 분당이 시작되면서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이로 인해 2007년 12월31일 기준 82,262명이던 민주노동당 당원 수는 2008년 말 70,970명으로 약 11,592명이 감소했다.
이 위기 속에서 민주노동당은 "부자를 위한 정부를 견제할 강력한 서민 야당"이 될 것을 다짐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세웠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100명의 후보를 출마시키고, 당원 수를 1만 명 확대하며, 10만 명의 정책 지지자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러한 목표 아래, 부산시당의 '당 사랑 운동'을 비롯해 충북도당 혁신위원회 구성 등 구당운동이 펼쳐졌고, 충북, 전북, 거제 지역과 노동조합에서 집단 입당이 이루어졌으며, 출마 후보들이 비대위원장 역할을 맡아 당원들과 함께 선거를 준비하며 지역 조직을 재건했다. 또한 민생을 돌보는 카드수수료 인하 서명운동과 학자금이자지원조례제정 주민발안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통해 민생정당의 됨됨이를 주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지역주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민생문제에 실질적 성과를 만들며 당원과 지지자를 늘렸다.
2010위원회와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이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예비후보들을 대상으로 분기별·단계별 ‘지방선거승리 아카데미’를 개최(2009.1.5)하며 내실을 다졌다. 전국 당직자 연수 진행, 대규모 분회장 대회를 성사시키며 간부들의 일치성과 단결력이 높아졌다. 정책당대회를 통해 2000명의 당원들이 참여하는 치열한 토론 끝에 ‘이명박 정권심판’ 또는 ‘불신임운동’안 대신 ‘이명박 정권 퇴진’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창당 이후 처음 열린 정책당대회(2009.6.20~21)가 수천명의 당원결의로 마무리 되면서 당원 결집과 결속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009년 말까지 당원 수는 67,428명으로 지속적 감소세를 보였으나, 탈당속도는 점차 줄어들었다. 경찰의 당 서버압수수색 등 이명박 정권의 '정치 탄압'에 대한 반발로 탈당했던 당원들이 일부 복당했다. 신규 입당자가 늘어나면서 2010년 말에는 당원 수가 76,053명으로 늘어나 분당 직전의 92%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2. 선명한 반(反) MB투쟁
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강력히 반대하며 '서민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정책과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입장을 견지했고, 주요 사안마다 선명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 민주노동당은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 차원에서 촛불 집회에 적극 참여하고, 전농 등 농민 단체와 연대하며 대중적 지지를 모았다. 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민주노동당의 선명한 반MB 투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2009년은 용산참사, 쌍용차 정리해고,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노동기본권 부정, 4대강 사업 강행,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으로 반MB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졸속협상으로 확인된 한미 FTA 국회비준시도(날치기)에 맞서 농민·시민단체와 함께 전국적인 시위와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와 함께, 이명박 정부의 미디어법 개정 시도와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국회 안팎에서 4대강사업과 미디어법 반대 시위를 주도하고 진보 정당 및 시민 단체들과 연대했다.
민주노동당은 6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사법파동위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위기, 남북관계 등 어떤 의제라도 조속한 시간내에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기를 기대한다”며 ‘야당대표 긴급 시국회담’을 민주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에 제안했다.(2009.5.22) 또 원내정당으로는 처음으로 ‘이명박 독재정권 퇴진’을 공식 선언했다. (2009.6.21.정책당대회 선언문)
민주노동당의 반MB 투쟁은 노동 운동에 대한 정부의 억압이 강화되면서 한층 가열되었다. 당내에서는 ‘반MB투쟁본부’를 결성해 이명박 정부의 독주에 맞섰고, 노동자, 농민, 빈민을 포함한 여러 사회 계층과 연대하며 투쟁을 확산시켰다. 이후 민주노동당 서버 압수수색으로 야5당1)이 '정치탄압'에 대해 강력 대응으로 한 목소리를 내면서 야권 연합이 공고해져 갔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반MB’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지지층을 결집했다.
2010년 5월24일 이명박대통령의 천안함사건 대국민담화로 전쟁위기가 가시화되면서 경제리스크도 고조되어 원-달러환율 20.4원2) 폭등, 코스닥 지수는 전일 대비 4.73포인트(-0.98%) 빠진 476.33으로 떨어졌다. 이정희의원(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27일 ‘전쟁반대·평화실현 10만 네티즌 시국선언문’을 띄우고 ‘전쟁 반대’ 서명 운동을 제안했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지방선거는 MB정권 심판에 더해 ‘평화수호’를 위한 선거로 확전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반MB 투쟁을 통해 당의 정책 목표를 더욱 명확히 했으며, 한미 FTA를 포함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서민과 진보 지지층의 신뢰를 얻으며 결집력을 강화했다.
3. 자력으로 인물난 해소
2008년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에 참여를 주저하던 8-90년대 학생운동 세대(전대협, 한총련세대)가 대거 입당하면서 당내 고질적인 정파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고 사고지역위원회가 정상화되었다. 분당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중앙당과 달리 지역 단위의 당내 단합 수준이 높아졌다. 특히 대선에서 큰 상처를 입은 권영길 (2008년 원내대표)대표의 뒤를 이어 강기갑(2008년 당대표), 이정희(2008년 정책위의장, 2010년 당대표)와 같은 새로운 인물들이 노회찬, 심상정의원의 탈당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며 당의 인물난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17대 총선에서 5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창원시 을 지역구에서 권영길 대표가 재선에 성공하며 진보정당 최초의 지역구 재선 의원이 되었다. 강기갑 의원은 이명박의 측근으로 알려진 현역 이방호3) 의원을 근소한 차이(178표)로 누르고 고향 경남 사천 지역에서 당선되어 역시 재선의원의 반열에 올랐다. 한나라당의 ‘MB악법’처리 과정에서 온몸을 던져 국회폭력의 대명사로 낙인찍혔지만 국민들에게 ‘강달프’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았다. 2009년에는 이정희 의원이 뛰어난 언변, 예리한 분석, 진심어린 모습의 의정활동을 통해 주목받았다. 이정희 의원의 존재 자체가 당의 새로운 미래로 인식되었다. 바야흐로 진보정치의 새로운 전성기가 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당의 신뢰는 차츰 높아졌고, 이듬해 2010년에는 헌정사상 최연소 정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당의 새로운 얼굴로 떠올랐다. 민주노동당은 대중투쟁에서 헌신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으며 대중의 편에 선 정치인을 가진 정당으로 국민들 속에 자리매김했다.
4. 야권연대 헌신과 진심을 다한 선거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민주당이 직전 총선에서 81석4)으로 쪼그라들은데다 차기 대선주자 부재로 위축된 상태에서 이명박정권의 무도한 탄압과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야권연대에 대한 이해관계가 매우 높았던 점을 선거연합의 계기로서 적극 활용했다.
이미, 2008년 11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가 만나 ‘민주대연합’과 이명박 정부에 대항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로인해 민주노동당이 정치적 구심력을 형성하고 주도성을 발휘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이어 치러진 2009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울산북구에서는 진보신당과 ‘후보단일화’로 조승수후보가 당선(민주노동당에서는 김창현 후보가 나섰으나 단일화경선 이후 사퇴하였다) 되었다. 경기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범민주 단일화 후보’가 당선되면서 반MB, ‘무상급식’, 진보대연합, 민주개혁세력 통합과 연대(야권단일화)가 이슈로 부상했다.
민주노동당 제1차 정책당대회 선언문(2009.6.21)을 통해서 “민주노동당은 당을 혁신 강화하고 진보정치대연합을 실현하겠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정권에 맞설 강력한 대안세력으로 거듭날 것이며, 진보정치대연합을 실현하여 올 10월 재보선, 2010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2009년10월 안산 상록을 국회의원재선거에서 민주당이 반MB단일후보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며 연합의 일시적 약화를 초래했다. 원심력이 큰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연합을 주도할 수 있는 책임있는 논의기구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후 야5당과 민주통합시민행동 등 4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5+4회의’5)가 출범했다.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권 심판과 진보·개혁 진영의 승리를 위해 시민사회와 야권이 손 맞잡은 것이다.
이후 ‘2010 연합정치 실현, 구체적 길을 묻다’ 연속토론회를 개최하여 논의를 성숙시키고 각 정당이 추구하는 방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해 길을 찾고자 했다. 토론회에서 당 정책위의장 이정희 의원은 2010년도 지방선거에 대해 '야권 연합'을 최대의 가치로 꼽았다. 더불어 "민주노동당이 절대 먼저 연대를 깨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2010년 임시당대회에서 이명박 정권의 정치탄압속에서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을 반영한 반MB 선거연합 기본원칙을 마련했다.(2010.3.1) ‘야5당 협상회의’ 등 야5당과 시민사회의 반MB 선거연합을 주도적으로 실현해 나가고, 최소강령과 핵심정책 합의에 기반한 정책연합, 야당탄압분쇄와 현안 공동대응 등 투쟁을 통한 정치연합, 연합공천과 후보단일화 방식의 선거연합 등 이다.
민주노동당은 기본원칙에 근거해 반MB야권 선거연대 실현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등 야 5당의 지방선거 연합 합의문6)을 발표 했다. 이후 7차례 심야회의 끝에 ‘광역 및 기초단체장은 합의하지 못하는 지역은 경쟁방식으로, 광역의원은 호혜의 원칙에 따른 배분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을 발표(2010.3.8)하였으나 진보신당은 ‘노회찬과 심상정 후보를 주저앉히려는 의도’라며 3월 16일 ‘5+4’탈퇴를 선언했다.
심지어 ‘야4당 협상회의’는 2010년 3월 17일 잠정합의안 발표를 앞두고 민주당 최고위가 추인을 거부하면서 결렬되었고, 이정희 정책위의장은 민주당에 기자회견을 통해 "시간이 그렇게 많습니까?"라며 공개적으로 따졌다. 2주 뒤 협상이 재개되었고, 이후 ‘어느 당 소속이든 국민들의 열망에 맞게 지방정부를 운영해 과거와 다른 면모를 선보여야 한다’(이상규, 2010.4.13)며 민주노동당은 야권에 ‘정책합의’를 제안하였다.
난항속에서도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기위한 노력으로 4+4 협상이 이어졌으나 4월 20일 경기도지사 경선규칙을 두고 민주당(김진표)과 국민참여당(유시민)이 합의에 실패하면서 협상결렬을 선언했다. 선거연합을 주도해온 민주노동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닥치더라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중략) 꺼져가는 야권연대의 불씨를 살리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 밝혔다.(4.21) 이미 야권의 지역별 연대는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중앙당차원의 협상이 서울과 경기, 호남 연대에 집중해왔다면, 인천·대전·경남·부산 등의 선거 연합 협상은 지역별로 전개됐다. 이에 민주노동당 후보들의 선거활동은 강화하는 한편 반MB 선거연합 실현을위한 방안을 모색해 나가기로 했다.
경남, 대전, 울산, 인천, 제주, 부산, 충북도 광역자치단체장 후보 단일화를 발표하면서 민주노동당이 보인 진정성과 노력이 주목받았다. 이에 6일 야4당 대표들은 결렬이 선언된바 있는 중앙당 차원의 야권연대 실패에 반성의 뜻을 표하고, 야권연대의 불씨를 살리기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중앙의 협상 결렬 이후에도 계속 돼 온 지역별 야권연대의 성과를 평가하고 야권연대가 실현 된 지역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의 선거지원에 나서기로했다. 또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한 지역의 경우 진보적 정책추진과 공동의 지방정부구성에 협력하기로 했다. 지역 단일화 소식에 이어 수도권에서도 5월4일 이상규 서울시장 후보가 야권연대 복원을 위한 후보자 원탁회의를 제안했고, 5월14일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하기로 하였다. 이정희 의원은 서울시장 후보인 한명숙 선거대책위원회에서 공동선대위원장과 대변인을 맡으며 선거운동 마지막 날까지 야권연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민들은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에게 참패를 안겼다. 야권연대에 헌신한 민주노동당은 선전했다. 기초단체장 3명 배진교(인천남동구)·조택상(인천동구)·윤종오(울산북구) 배출 뿐만 아니라 경남에서 처음으로 도의회에 교섭단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물론 야권 단일화로 광역단체장 후보가 대폭 줄어들면서 광역비례 정당득표가 고전한 것에 대한 내부비판이 있었으나 2008년 총선 당시의 정당지지율과 비교하면 소폭 상승했다.

5. 지방선거 이후 높아진 정치적 위상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야권연대에 헌신하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여성 당선자가 63명으로 전체의 44.4%를 차지했으며, 평균 나이는 41.4세로 젊은 층의 정치 참여와 당선이 돋보였다. 이는 민주노동당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또한, 1% 미만의 격차로 석패한 후보가 10명에 달했는데, 이 중 광역의원 후보가 2명, 기초의원 후보가 8명이다.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낙선한 기초의원 후보는 12명이나 되었지만, 이는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후보들이 유권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과는 민주노동당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향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민주노동당은 “앞으로도 야권연대와 진보정치세력의 대단결을 통해 더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밝혔다.
분당에 따른 위기의식과 이명박 정권의 극심한 탄압에 맞선 저항의지로 당내 단결력이 강화되었으며, ‘반MB가 먼저냐 진보정치단결이 먼저냐’ 등 사소한 이견차이도 ‘당의 단결이 먼저’라며 봉합되었다. 나아가 당 지도부의 통찰력있는 정세분석과 과감한 전략적 판단으로 민주당과 반MB선거연합을 주도해 민주시민 전체로부터 뜨거운 응원을 받았다.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은 민주노동당은 이듬해인 2011년 민주당 대선주자 반열에 있던 유시민 대표가 이끌던 국민참여당과 합당7)을 통한 새로운 정치실험에 돌입했고, 노회찬,심상정 의원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만든 새진보통합연대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 뒤로 통합진보당이 순탄한 경로를 밟았다면 2012년 진보민주연합정권 수립의 한축을 담당하였을 것이고 한국정치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다.
1 정세균(민주), 강기갑(민노), 송영오(창조), 노회찬(진보), 이재정(참여)
2 2009년 9월15일 종가 1218.5원이래 8개월만에 최고치 1.71% 폭등 1,214.5원으로 거래를 마감했다.(사흘째 원달러환율 50원급등)한국의 외평채 가산금리와 부도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디폴트스왑(CDS) 프리미엄도 9월이래 최고치로 폭등했다.(뷰스앤뉴스, 2010.5.24), 코스피지수는 오전 1600이 무너졌으나 기관의 2,000억원 가량 순매수로 지수방어에 나서 코스피는 4.75포인트, 0.3% 오른 1,604.93으로 장을 마쳤다. (YTN, 2010.5.25)
3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실세'이며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었음.
4 통합민주당 손학규, 정동영, 김근태, 한명숙 등 굵직한 정치인들이 낙선했다. 한나라당 153석, 친박연대 14석, 무소속연대(친박계) 12석, 자유선진당18석으로 거대여당이 탄생하며 의회권력이 교체되었다.
5 5+4회의에는 민주당 윤호중 사무부총장과 민주노동당 오병윤 사무총장, 창조한국당 김서진 최고위원, 진보신당 정종권 부대표, 국민참여당 김영대 대외협력위원장 등 야 5당 지도부가 모두 참여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 인사로는 백승헌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박석운 2010연대 운영위원, 황인성 시민주권 소통과 연대 위원장, 이형남 민주통합시민행동 운영위원 등이 있다.
6 "야 5당은 민주주의 후퇴, 민생 파탄, 평화 위기로 특징되는 이명박 정부의 일방독주를 막고 국민에게 희망을 드리기 위하여 2010 지방선거에서 연합하여 공동대응을 추진하기로 했다."(2010.2.10)
7 국민참여당은 2011.12.4. 주권당원 8,736명 중 6,765명(77.2%) 투표, 89.33%(6,043)진보통합 찬성
'진보정책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3-6. [숫자로 보는 정책] 일터를 떠난 여성들: 사무직 ‘경단녀’ 재취업의 경로와 특징 (2) | 2025.07.24 |
|---|---|
| 3-5. [손에 잡히는 정책] 지역공공의료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0) | 2025.07.24 |
| 3-3. [논단] 진보적 조세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 (0) | 2025.07.24 |
| 3-2. [논단] 산별노조운동과 진보정당, 재도약의 힘찬 날개짓을 바라며 (0) | 2025.07.24 |
| 3-1. [발간사] 오염된 단어, 선전(propaganda)을 복원해야 (2) | 2025.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