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전망] 트럼프 정부의 관세·산업정책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과 함의 -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손정순(금속노조 노동연구원 비상임연구원)
1. 문제제기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하면서 전세계 산업 생태계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미국우선’이라는 정책 기조하에 출범하자마자 캐나다, 멕시코, 중국 제품에 대하여 10%~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은 세 개의 행정명령을 발표하였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관세 부과는 이후 한 달간 유예되었고 중국에 대한 관세는 2월 4일부터 부과되었다. 2월 18일에는 미국에 수입되는 자동차와 반도체에 대해서도 25%의 관세를 단계적으로 부과할 계획임을 밝혔고 3월 4일부터는 중국에 대해 추가 10% 관세를 부과하고 유예된 캐나다, 멕시코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대선 유세 내내 공언해 왔던 것처럼 무차별 관세를 통해 미국 내 산업을 보호하고 고용을 늘리겠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1995년 WTO 체제가 출범한 이후 무역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렸던 관세를 경제 규모세계 1위 국가인 미국이 주도해 부활시키면서 미국발 관세 전쟁이 전면화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대미 교역에서 매년 수백 억 달러 흑자를 보는 국가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는 ‘반드시 손봐야 하는’ 교역 상대국인 것이다.
필자는 트럼프의 관세 전쟁 전개 상황도 주시해야 하지만 관세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미국의 산업정책 방향·내용·의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관세는 미국이 한국과의 교역 관계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실현시켜 줄 여러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관세정책을 포함한 트럼프의 산업정책이 한국에 미칠 영향과 함의, 그리고 한국의 대응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대상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다. 반도체는 모든 전자제품에 쓰이기에 산업의 쌀로 불리는 핵심 부품이다. 주지하다시피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로서 미국의 관세와 산업정책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국내 제조업의 부가가치와 고용에서 반도체 산업은 자동차 산업과 함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핵심 산업이다. 트럼프의 관세정책, 나아가 반도체 산업 정책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칠 영향을 파악하고 노동의 관점에서 대응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트럼프 2기 정부의 반도체 산업 정책
1) 반도체 제조의 내제화
경제사적으로 보면 19세기 관세는 후발 국가가 유치산업 보호·육성을 통해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이루기 위한 핵심 정책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20세기 대공황 직후에는 자국의 산업·고용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주요 선진자본주의 국가 간 관세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관세는 자국의 특정 산업 보호·육성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온 것이다.
트럼부 정부가 촉발한 관세 전쟁은 반도체 산업에 한정해 본다면 기본적으로 반도체 제조의 내제(內制)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최첨단 반도체를 한국과 대만에서 수입하지 않고 미국 내에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트럼프의 공언으로 확인된 내용이다. 반도체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힌 지난 2월 18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트럼프는 “그들이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 간단히 말해 관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라며 “그들이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면 관세를 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미국에 반도체 제조 팹(fab)1)을 지으라는 것이다.
사실 반도체 제조 내제화 정책은 전임 바이든 정부 때부터 본격화된 정책이었다. 바이든 정부는 2022년 ‘반도체 및 과학법안’(CHIPS and Science Act of 2022, 일명 칩스법)을 통해 반도체 제조 내제화를 본격 추진해 왔다. 1980년대 말 일본과의 반도체 치킨 게임에서 패배한 미국은 이후 반도체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왔다.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제조역량을 지닌 반도체기업은 인텔과 마이크론 뿐이며 군사·안보용 첨단 반도체를 제외한 민간소비용 반도체는 동아시아 반도체 국가들(한국, 대만, 일본)로부터 수입에 의존해 왔다. 그렇다고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2류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의 지적 특허(IP), 특히 설계 영역의 지적 특허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어 뛰어난 설계역량과 다양한 팹리스(fabless)2) 반도체 산업생태계 구축, 그리고 거대한 전자제품 내수시장을 배경으로 전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 왔다. 바이든 정부의 칩스법은 지난 30여년 간 지속되어 왔던 반도체 외주생산 정책 방향을 전면 변경한 것이며 트럼프 정부는 관세 부과로 이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바이든 정부는 당근을 주로 썼다면 트럼프 정부는 채찍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지난 3월 4일 미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는 칩스법을 폐지하겠다고 밝힌 것처럼 트럼프 2기에서 추진될 반도체 산업 지원정책은 보조금이 아닌 관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실제 반도체법이 폐지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미국에 팹을 건설하고 있거나 패키징 공장을 계획 중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보조금 삭감, 내지는 가드레일 규칙(보조금 지급 조건) 강화 등으로 미국의 반도체 제조 내제화에 더 압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대만의 TSMC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밝히기도 했다.
2) 전세계 반도체 가치사슬 생태계의 재편을 통한 중국 배제
트럼프 정부가 관세부과를 통한 미국의 반도체 제조 내제화를 추구하는 더 구조적인 목표와 의도가 있다. 미국, 일본, 한국, 대만이 주도해 온 전세계 반도체 산업 가치사슬 생태계에서 중국을 완전 배제하겠다는 것이며 이 측면이 오히려 한국 반도체 산업에 더 구조적으로, 더 크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사실 미국의 반도체 제조 내제화 정책도 큰 틀에서 보면 산업 측면의 대(對)중국 봉쇄전략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귀결된 정책이다. 미-중간 패권 경쟁의 핵인 중국의 군사력 팽창에 미국이 원천 기술을 가진 첨단 반도체가 활용되어 왔기에 미국은 중국의 군사적 굴기(屈起)를 꺾기 위해 반도체 가치사슬 생태계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디커플링(decoupling) 정책을 추진해 온 것이다. 이는 군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트럼프 정부 1기 시기 대(對)중국 반도체 통제는 개별 기업에 대한 수출 제한에 머물렀다. 바이든 정부는 개별 기업에 대한 수출금지를 넘어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다. 2022년 미 상무부는 자국 기업인 엔비디아와 AMD에게 중국이 군사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첨단 AI 반도체 수출을 금지시켰다. 2023년에는 미국산 기술이 포함된 반도체 제조 장비와 인공지능, 슈퍼컴퓨터에 사용하는 반도체칩 수출을 제한하였고 2024년 12월에는 AI용 고 대역폭 메모리 반도체(HBM) 수출을 금지시켰다. 또한, 바이든 정부는 자국 기업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에 그치지 않고 동맹국을 압박해 미국 특허 기술이 포함된 반도체 핵심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시켰다. 이 조치는 2기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한편 바이든 정부는 2022년 ‘칩4 동맹’을 제안하며 반도체 강국인 한국, 일본, 대만 등과 연합하여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반도체 설계와 제조 장비, 원천 기술 등을 책임지고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부품, 대만은 시스템 반도체를 담당해 미국 내 팹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내용이다. 칩스법의 핵심 목적은 이를 위한 것이었다. 대만과 한국 반도체 산업에 내재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완화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반도체 가치사슬 생태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핵심 정책이기도 하다. 전세계 시스템 반도체의 60%, 메모리 반도체의 60%를 생산하는 대만과 한국에서 유사시 군사적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 주도의 반도체 산업 가치사슬 생태계는 순식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고 가장 큰 피해는 미국이 입기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에 이어 트럼프 2기 정부가 관세 부과를 통해 반도체 제조 내제화 정책을 가속화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첨단 반도체 산업 영역에서 중국을 배제함으로써 미국 패권을 지속시키려는 것이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이 산업 영역에서는 반도체 산업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3. 한국 반도체 산업에 미칠 영향
1) 한국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특징
1980년대 초 발전국가형 지원체계와 해외 기술 도입으로 시작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60% 전후의 점유율을 보이며 전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40년 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 과정을 요약하면 ‘메모리 반도체의 생산·제조’에만 집중한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반도체 시장은 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로 구분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규모는 작다. 2024년 전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약 6,200억 달러 규모인데 메모리 반도체 비중은 이 중 약 25%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으로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어찌 보면 골목대장 노릇만 해 온 셈이다.
또한 반도체 설계에서부터 제조와 후공정인 패키징까지를 모두 수행하는 삼성, SK 하이닉스 등 종합반도체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인 가치사슬(하청) 체계를 띠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반도체 칩 생산 과정은 크게 설계-제조-테스트·패키징으로 구분되며 각 영역별로 전문화된 사업체들이 분업하면서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AI용 반도체로 급부상한 엔비디아는 그래픽 CPU 전문 설계 업체이며 실제 칩 생산은 파운드리(foundry)3) 업체인 대만의 TSMC가 수행해 패키징을 거친 후 엔비디아에 납품한다. 이러한 반도체 생태계는 애플, 퀄컴, AMD 등 글로벌 반도체 사업체 모두 동일하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제조분야의 경쟁우위에 기반해 설계에서부터 패키징 까지를 모두 하나의 사업체가 수행한다. 또한 한국의 하청구조, 즉 위계적인 가치사슬 구조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종합반도체 사업체가 반도체 산업 전반을 좌우하고 있다. 시장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경기침체, 나아가 반도체 산업 전반의 구조적 변화에는 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반도체 대기업은 이러한 단점을 통제하기 위해서 하청업체들을 철저하게 포괄하여 생산은 일체화하고, 비용과 리스크는 하청업체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위계적 가치사슬 구조를 통해 부담을 전가해 왔던 것이다. 이는 주로 재무적 부담을 전가해 온 것이지만 한국 반도체 사업 전반의 구조적 변화, 그것도 한국 반도체 산업에 불리한 구조적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면 차원이 다른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바로 고용 문제이다.
2)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의 영향
지금까지 발표된 트럼프 2기 정부의 관세 정책 내용만 보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미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년 7%~8%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으로 미국에 대한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은 106억 7천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 1,143억 8천만 달러 중 8.1%를 차지할 정도로 적은 편이다4). 메모리 반도체는 전자기기의 핵심 부품으로 활용되기에 주요 수출국은 전자제품 조립공정이 자리 잡고 있는중국과 베트남, 홍콩,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전자제품 부품용 메모리 반도체가 주력인 삼성전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관세부과에 따른 영향이 적을 것으로 판단하는 이유이다.
반면 TSMC같은 파운드리 업체의 경우에는 다르다.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 칩을 미국의 팹리스 반도체 업체에 납품하기에 관세 부과에 따른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 반도체 관세 부과가 파운드리의 반도체 가격, 나아가 최종 팹리스 업체의 반도체 가격을 높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라면 관세 부과에 따른 가격 상승폭 또한 크며 중·장기적으로는 수요 감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아리조나주에 이미 팹 라인을 운영하고 있는 대만 TSMC가 향후 4년 간 미국에 1,0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결정한 주된 이유이자 삼성이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팹 라인을 건설
하는 이유이다.
AI용 반도체인 엔비디아의 그래픽 CPU칩에 탑재되는 고 대역폭 메모리 반도체를 독점 공급하고 있는 SK하이닉스 또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AI용 핵심 반도체를 거의 독점하고 있지만 엔비디아의 GPU칩은 대만의 TSMC가 최종 납품하기에 SK하이닉스도 관세부과에 따른 영향을 피할 수 없으며 삼성전자나 TSMC 처럼 미국 현지에 팹 건설 압력이 가중될 것이다.
3) 글로벌 반도체 산업 가치사슬 구조 재편의 영향
초기단계라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반도체 가치사슬 체계가 가시화될수록 한국 반도체 산업의 구조조정 압력은 누적될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로 서로 맞물려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이 첨단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 통제를 현재보다 더욱 강화하는 경우이다. 지금은 AI에 활용되는 최첨단 분야의 시스템 메모리 반도체와 고 대역폭 메모리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고 있지만 10나노 미만의 첨단 메모리 반도체까지 수출 통제를 확대할 경우 한국 반도체 산업은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메모리 반도체 설계·생산에는 미국의 원천 기술이 적용되어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출을 통제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 반도체 산업, 특히 중국에 첨단 전자제품용 반도체를 수출하고 있는 삼성은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이다. 중국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첨단 반도체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왔기에 지난 20여년 간 반도체 국산화를 추진해 왔다. 2014년부터는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반도체 제조기술 및 노하우 축적을 위해 로컬 파운드리 육성을 추진해 왔으며 대규모 선행 투자비용을 지원하고자 지난 10년 동안 두 차례 국가 주도의 반도체 투자기금을 조성해 왔다. 반도체 투자기금은 주로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으며, 이를 통해 SMIC, Huahong 등 중국 반도체 사업체의 제조역량이 큰 폭으로 성장하였다. 작년에는 3,440억 위안(한화 약 64조 원) 규모의 3기 반도체 투자기금을 조성해 AI 반도체와 고 대역폭 메모리 제조기술 확보에 투자를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제재에 맞서서 독자적으로 반도체 굴기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15나노~20나노 급의 구형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중 간 가격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2023년 후반부터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실적이 저조한 이유로서 과거 한-일 간 치열하게 벌어졌던 반도체 치킨 게임이 조만간 한-중 간에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배제에 맞서 중국 또한 반도체 제조 내제화를 통해 자족적인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은 한국과 달리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 영역의 팹리스 산업 생태계가 이미 활성화되어 있고 미국의 제재 속에서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5). 메모리 반도체 제조 기술은 존속적·적응적 기술혁신이기에 시간이 문제일 뿐,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은 것처럼 언젠가는 중국의 따라잡기(catch-up)가 충분히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수출의 50%~60%를 차지하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내제화 정도가 높아질수록 한국 반도체 산업이 직면하게 될 구조적 위험은 높아진다. 중국을 대신할 대체 시장을 찾기도 어렵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를 제외하면 메모리 반도체를 수요하는 국가 대부분은 최소한 전자업종 선진국들이기에 메모리 반도체 제조는 언제든 국산화할 수 있으며, 실제 코로나19 시기 전자업종 공급망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도체 자급화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다6).
국내에서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의 수출시장 자체가 구조적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에 반도체 사업체의 고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4. 함의와 노동의 대응
미국과 중국 모두 자국 중심의 반도체 제조 내재화라는 지난 30여 년간 지속된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에 구조적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부과는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미-중 양국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한국 반도체 산업은 구조적 압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반도체 제조 내재화가 심화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최대 시장인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점차 밀려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구형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급부상함에 따라 삼성은 작년부터 기흥 사업장에 있는 구형 메모리 라인의 가동률을 낮추고 인력을 화성사업장 중심으로 재편해 왔다. 메모리 반도체 위주의 사업구조 개선을 위해 지난 4년간 80조 원을 투자할 정도로 야심차게 추진해 왔던 삼성의 파운드리 사업은 시장 점유율 9%를 기록할 정도로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 따라 수주 부진으로 평택에 건설 중이던 6개 팹 중 3개 팹은 완공 시기를 늦췄다. 나아가 미국에 건설 중인 팹도 바이든 정부의 보조금 지급 약속을 트럼프가 파기하겠다고 선언해 추가적인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 1위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체인 삼성에 구조조정 압력이 누적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2년 간 고 대역폭 메모리 시장을 선점해 호황을 누려왔던 SK하이닉스는 관세부과에 따라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주로 AI용으로 쓰이는 고 대역폭 메모리는 TSMC가 생산한 시스템 반도체와 같이 패키징된다. 관세를 피하기 위해 TSMC는 미국에 이미 현지 팹 라인을 건설해 가동하고 있기에 SK 하이닉스는 미국에 반도체를 수출할 수밖에 없고 결국 관세부과에 따른 영향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4세대 이상의 고 대역폭 메모리는 한국이 독점 생산하고 있기에 관세 부과에 따른 수요 감소 우려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에 따라 장기적으로 SK하이닉스는 고 대역폭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 팹리스 반도체 사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 현지에 팹 라인을 건설해야 할 압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SK 하이닉스가 주도하고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향후 10년간 120조 원을 투자하는 가운데 재무적 부담이 높아지는 셈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미-중 간 반도체 산업 갈등이자 구조변화이기에 한국의 반도체 산업 노동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적은 편이다. 최우선적으로는 반도체 산업 노동자의 집단적 이해대변을 높여야 한다. 반도체 산업 내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무노조를 견지해 왔던 삼성전자 내 반도체 부문 노동자 조직화는 아직은 초기 단계이며, SK하이닉스 노조 또한 철저한 기업별 노조주의에 안주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삼성전자 내 비생산직 노동자 조직화에서 일정 정도 교두보를 구축한 점은 의미 있는 성과이다. 전자대기업의 경우에는 사무직과 연구·개발직 노동자 규모가 생산직 노동자 규모를 능가한 지 오래되었으며, 양 직종은 모두 청년 세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구조 변화에 가장 크게 영향 받을 생산직-엔지니어 노동자 조직화 필요성은 점증할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 조직확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를 기반으로 노동이 적극적인 경영참여를 요구해야 한다. 조직확대와 더불어 단체협상이나 노사협의회를 통해 삼성, SK하이닉스의 경영 실태와 경영 전략을 파악해 노동조합이 선제적으로 고용의제를 던질 필요가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중국의 반도체 제조역량 확대에 따라 팹 라인 정리가 필요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고용 문제 또한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지금은 소재·부품·장비 위주로 축소되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구조조정 과정을 복기함으로써 향후 노동의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정부를 대상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고용, 노동정책을 요구를 노사가 함께 제기하도록 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 시기 수립된 반도체 산업 정책은 오로지 반도체 산업의 성장 지원 정책만 있을 뿐, 고용·노동 정책, 특히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고용정책은 없기 때문이다.
1) 반도체 제조 생산라인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2) 반도체 제조 라인을 갖지 않은 반도체 사업체를 말한다. 실제 반도체 제조는 전문 생산업체인 파운드리(foundry) 업체에 맡겨 납품받는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등 미국 내 반도체 사업체 대부분은 팹리스 사업체이며 파운드리 사업체로는 대만의 TSMC 사업체가 대표적이다.
3) 반도체 제조를 전담하는 업체를 말한다.
4) 정형곤 (2024), ‘한국 반도체 산업의 수출입 구조 및 글로벌 위상 분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5)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제재 속에서도 7나노 공정에 기반한 시스템 반도체(AP 반도체)를 개발했다. ‘7나노 성공 화웨이, 5나노도 가능? 중국 ‘반도체 굴기’ 어디까지’, 《경향신문》, 2023. 9. 22일 자(https://m.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2309211648001). 7나노 시스템 반도체를 개발했다는 것은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기준인 7나노급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했음을 의미한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제조가 메모리 반도체 설계, 제조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6) 삼성, TSMC의 미국 투자, TSMC의 일본 투자에 더해 유럽연합 또한 ‘EU 반도체법’을 통해 반도체 생산 자급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 및 독일 반도체 시장 현황’ (KOTRA, 해외시장뉴스, https://dream.kotra.or.kr/kotranews/cms/news/actionKotraBoardDetail.do?SITE_NO=3&MENU_ID=180&CONTENTS_NO=1&bbsGbn=243&bbsSn=243&pNttSn=20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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