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연구] 젠더, ‘갈등’ 프레임을 넘어 ‘공존’을 모색하자
신경아(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1. 윤석열 탄핵과 함께 탄핵되어야 할 것들
윤석열 탄핵을 앞두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피가 마른다’고나 해야 할까? 우리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12월 3일 밤 이후 탄핵 가결을 이끌어내기까지 국회를 지나 이제 시간은 헌법재판소 앞에서 멈춰 섰다. 전 국민이 밤잠을 설치며 지켜봤던 윤석열 체포 작전. 군부대까지 호위무사로 만들어 사병(私兵)화한 채 관저에 틀어박혀 있던 윤석열을 간신히 끌어내 구치소로 보낸 기억이 어제 같은데, 3월 8일 저녁 윤석열은 다시 관저로 돌아갔다. 구치소에서 잠을 많이 자 건강이 좋아졌다는 그의 얼굴 앞에서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 못 이뤘던 밤들이 떠올라 토할 것 같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궜다.
12월 3일 밤부터 지금까지 국민들의 일상은 멈춰져 있다. 계엄과 탄핵, 윤석열 파면을 위한 헌재 심판, 윤석열과 함께 내란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군과 각료, 공직자들의 조사와 처벌을 위한 모임들을 지켜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하루를 맞는다. 멈춰선 국민들의 시계는 윤석열의 파면과 동조 세력들의 처벌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의 탄핵과 파면은 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검건희를 포함한 내란 주범들과 가담자들, 그들의 변호인들, 한남동과 광화문을 들락거리며 윤심과 표심을 노리는 정치인들, 검찰과 법원·경찰의 반탄 카르텔, 탄핵 요구의 약점만을 집요하게 물어뜯는 일부 언론들, 돈과 권력의 맛에 취해 거짓과 선동을 뿌려대는 극우 유튜버들, 아스팔트 탄핵 반대 시위를 주도한 극우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 교묘한 언술로 탄핵의 정당성을 법적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지식인들. 윤석열 탄핵과 함께 모두 탄핵 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 중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젠더 갈라치기’라는 이분법적 선동으로 정치적 이득을 꾀하려는 집단이다. ‘이대남 이대녀’로 청년들을 나누고 갈라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정치적 전략은 하태경, 이준석 등에 의해 시작돼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의 1호 공약 ‘여성가족부 폐지’로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 전략 이 윤석열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기존 정치권에서는 이 선동 전략의 효과로 20대 남성들이 윤석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투표 참여율 자체는 10대부터 30대까지 청년층의 경우 여성에 비해 남성이 훨씬 낮았다. 젠더 갈라치기 전략에 동의하지 않은 청년 남성들이 투표 자체를 외면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반여성·반성평등 기조는 윤석열 정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장관조차 임명하지 않은 채 식물부처로 간판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여성가족부의 처지는 물론, 정부의 모든 문건에서 여성과 젠더, 성평등이란 단어 자체가 삭제되어 왔다. 여성가족부 예산에서 ‘성평등’ 관련 정책 예산은 거의 삭감되었고, ‘고용평등상담실’처럼 가장 나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의 상담과 법률 지원을 위한 예산은 폐지되었다. 또 법무부 등 정부 8개 부처의 성주류화를 위한 기구인 양성평등정책담당관제도 늘 폐지의 압력에 시달려 왔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30여 년이 훨씬 넘는 역사에서 처음으로 세무조사란 것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윤석열의 파면은 여성정책의 복원과 성평등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윤 정부의 등장과 몰락,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저항과 시민운동,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이래 여성들은 사회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함께 싸워 왔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부문 운동의 위치에서 벗어나 운동의 독자성을 주장할 때 늘 비판에 직면했다. 성평등은 민주화라는 대의 앞에서 뒤로 밀려나야 했고 여성운동가는 분리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의 선두에 서고 성평등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완성할 것이라는 주장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목격해 왔다. 바로 윤석열 정부의 안티페미니스트 정치에 맞서고 한겨울 탄핵 광장을 응원봉으로 밝힌 여성들이다.
사실 따져보면, 훨씬 더 이전,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운동에 앞장선 촛불 소녀와 유모차 부대가 있었다1). 그러나 광장을 이끌었던 지식인들의 성인지적 관점의 결여(gender blindness)는 잠깐의 환호성 후 이들을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버렸다. 이후 여성의 목소리나 성평등의 요구는 광장을 넘어선 정치와 정책의 세계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라는 암흑기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 이르렀지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는 구호에 걸맞는 정책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윤석열 탄핵 이후 새로운 정부에서는 여의도와 남태령, 한강진, 그리고 안국동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성 시민들의 요구를 정치와 정책에서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2. 탄핵 이후 새 정부의 여성·성평등 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나?
굳이 ‘여성·성평등 정책’이라고 쓰는 이유는 ‘여성’과 ‘성평등’의 의미가 달라서는 아니다. 현시점에서는 ‘성평등 정책(gender equality policy)’, 즉 노동시장과 가족,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성별 격차를 해소하고 성평등 수준을 높여가기 위한 정책의 범주 안에 여성 정책도 포함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여성 정책은 여성에 초점을 두고 삶의 조건과 지위를 개선해 가는 데 목표를 둔 정책이며, 성별 불평등 해소를 목표로 하는 성평등 정책보다 역사적으로 앞서 시행되었다. UN의 분류에 따르면, 여성발전(WID, Women-in-Development)에서 젠더정책(GAD, Gender-andDevelopment)으로, 이제 젠더주류화(Gender Mainstreaming)를 통한 젠더전환(Gender Transformation)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성에게 집중한 정책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정부 정책 전반에 성인지적 관점을 통합하며, 그 결과 사회 전반에서 젠더관계를 변화시켜 가려는 실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 정부 이후 한국의 여성·성평등 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과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의 성별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 지난 20여 년간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경험한 변화를 요약하면, 여성의 고용률은 높아졌지만, 성별 불평등은 지속되고 있다. 여성 고용 증가는 100인 미만의 중소·영세 사업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임금은 20대 중반 이후 연령층에서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우위성이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2) 그 결과 생애 기대 임금은 아래와 <그림 1>과 같이 분리된 분포를 이루고 있다. 성별 임금격차 31.2%라는 최종 지표가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정부 출범 이후에는 한시적으로라도 특단의 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외국에서는 고용평등기회위원회(EEOC, Equal Employment Opportunity)처럼 노동시장과 일터의 성차별과 성별 불평등을 찾아내고 해소해 갈 수 있는 준사법적 권한을 갖는 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한국에서는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최근 성차별을 심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노동자의 상담이나 직접적인 사례 발굴과 조사 등의 포괄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진 곳은 없다. 동시에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ffirmative Action)의 실효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현재는 노사발전재단에서 적극적 조치를 제도적으로 점검하고 있으나, 큰 실효성은 없다. 그러나 고용평등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는 제도는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와 차별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고 강화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젠더폭력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확대해야 한다. 교제 폭력과 살인, 딥페이크 처벌에 대해 법안이 갖는 실효성을 강화하고 비동의강간죄를 입법화해야 한다. 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예산의 확충도 중요하다. 또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폭력 예방과 성평등 교육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고 교육의 질을 개선해 가야 한다. 남성들이 아동기와 청소년기부터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에 노출되고 둔감해지지 않도록 성인지 관점과 민주적 시민의식을 내면화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셋째, 돌봄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공공재로서 돌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 가야 한다. 시장과 가족, 개인에게 맡겨진 돌봄의 책임은 앞으로 전개된 고령사회에서 저소득층과 여성들에게 더욱 큰 부담을 가져올 것이다. 아동부터 노인, 장애인,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때 돌봄을 받고, 돌봄노동자와 돌봄제공자들이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일자리를 개선해 가야 한다.
넷째, 여성·성평등 정책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서는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할 기구가 중요하다. 그동안 여성가족부는 작은 예산과 권한으로 취약집단 여성을 보호하는 수준, 그리고 극히 제한된 범위의 성평등 정책에 머물러 왔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윤석열 정부의 구호가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킨 반감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책의 체감도가 낮으니 정책의 폐지에 대한 반발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평등 정책은 정부 부처 전역에 도입되고 정책 전반에 통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조정 기능은 현재와 같은 위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동안 논쟁이 있었지만, 성주류화를 추진할 수 있는 기구를 대통령 직속으로 둔다면 성평등을 포함한 사회적 다양성을 확산하고 이민자 등 소수 집단을 통합해 가기 위한 정책을 시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3. 젠더 담론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응원봉을 들고 다시 만난 세계’가 한동안 회자되었지만,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서는 ‘여성’이나 ‘성평등’은 여전히 금기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거에서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여성을 호명하는 것이 청년 남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보수 진영에 투표하게끔 할 것이라는 우려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에 청년 남성들 중 국민의힘 강성 지지자들이 민주진영으로 이동하기는 어렵다. 이준석이나 윤석열의 강성 지지자들이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 지지자로 돌아서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조사에서 지적되어 온 것처럼, 청년 남성들의 다수는 오히려 관망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이 싫어 반사적으로 윤석열에게 표를 던진 청년 남성들은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며 정세를 지켜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젠더 갈등’이라는 이분법을 깨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동안 정치권과 대다수 언론은 이준석의 젠더 갈등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 써 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진실일까? 예를 들어, 군복무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는 정책이 여성의 이익에 반(反)하는 것인가?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조건을 개선하는 일이 남성을 밀어내자는 것인가? 여자대학을 운영하는 것이 남성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인가? 군복무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는 일에 반대할 여성은 없고,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조건이 개선되면 남성들의 가족 생계부양 책임이 가벼워진다. 대학 입학 정원이 대입 지원자보다 많아지는 한국사회에서 대학 선택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지는데 몇 개 되지 않은 여대의 존재를 탓할 이유는 없다. 청년들에게 주어질 파이를 늘리며 윈윈 할 수 있는 정책의 방향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탓이다.
많은 여성학자들은 우리가 직면해 온 이 문제를 ‘젠더 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1960년대 썼던 ‘인종 갈등’이라는 말이 이제는 ‘인종 차별’로 바뀐 것처럼, 여성과 남성이 정말 동등한 수준에서 ‘갈등’ 같은 것을 할 만큼 사회가 바뀌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지금 이해하려는 이 현상을 ‘백래시’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민주적 진보에 대한 반격, 즉 백래시가 젠더관계에서 폭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의도된 것, 정치적 목적에 의한 선동이며, 성차별이 심각한 한국사회에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는 인식이다.
어떤 사회에나 차이를 지닌 존재,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갈등과 대립, 적대의 주요 전선이 되는 데에는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 한국사회에서 ‘젠더 갈등’은 하태경, 이준석, 윤석열로 이어지는 보수와 극우 정치세력들의 포퓰리즘적 대중 선동의 효과라고 보아야 한다.3) 그러므로 이들의 선동 프레임, 즉 여성과 남성을 대립적인 위치로 몰아가는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별은 적대의 기호가 아니라 차이의 기호이며, 공존과 협력의 기호로 해석되어야 한다.
1) 당시는 유아차를 유모차로 불렀다.
2) 신경아(2024), “노동시장은 성평등해지고 있나: ‘젠더갈등’과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 『여성학논집』 제41집 2호.
3) 신경아(2023), 『백래시 정치: 안티페미니즘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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